외딴방

글쎄요, 다 좋군요

sputnik.K 2013. 12. 11. 03:21

 

<라'빠르망>을 처음 봤을 때 사랑에는 저런 한 두 장면만 기억되어도 좋겠다, 생각했다. 막스가 리자를 부를 때 리자가 막스 모르게 짓는 표정 같은 것들. 리자는 공원에서 막스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도 못 본 척 그가 자신을 두 번이나 부르고 나서야 "응?" 하는 태도로 뒤돌아보는데, 영화 초반에는 막스의 시각으로만 뒤돌아보는 리자를 보여주다 후반부에 가서야 사실은 그녀가 "리자!" 하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막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두 눈을 감고 미소 짓고 있던 것을 보여준다. 좋아하는 사람으로부터 이름이 불릴 때의 저 기분을 나는 정말 좋아한다. 연애를 시작하면 연인들은 그들만의 애칭으로 서로를 부르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이름을 불러주는 것보다 더 달콤하고 로맨틱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겐 그동안 서로의 이름을 불러줄 시간이 많지 않았으니까. 

 

어찌되었든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가 나에게로 와 꽃이 된' 그 장면이 좋아 며칠 전 영화를 다시 보는데, 보다 보니 영화 첫 장면의 배경인 보석상에서 등장인물들이 반지에 비유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다음은 막스와 보석상이 대화를 나누는 첫 장면이다.

 

보석상: 이 반지를 보세요. 단순하면서도 당당하죠. 검소하지만 귀족적이며 품위가 있습니다.

이건 약간 좀 별나죠. 아주 반짝거립니다. 상처나기 쉬우니까 손대지 마시고 그냥 보기만 하세요.

이건 좀 더 은은하죠. 보기에는 흐려 보이지만 빛을 비추면 그 광채가 대단하죠. 별처럼 말이에요. 대단하죠?

막스: 네... 글쎄요. 다 좋군요.

 

여기서 세 반지의 각기 다른 특성 만큼이나 흥미를 끄는 건 막스의 대답이다. "글쎄요. 다 좋군요." 사실 이런 태도를 가진 남자(혹은 여자)들은 현실에 보급형 핸드폰만큼이나 널려있고, 영화 속의 그도 자신의 대답만큼이나 성실하게 세 여자를 다 좋아한다. 그런데 몇 년 전과는 달리 그런 막스를 보며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이해가 되었던 것은 나의 순수의 시대가 저물어서일까, 아니면 이제서야 순수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