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방

연애의 시간이 지나면

sputnik.K 2015. 7. 18. 11:17
 
 
 
  

 

 

어느 시기에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멋지고 또 덧없는 일일까. 시절인연이 지나간 자리에는 늘 어쩌지 못하는 감정과 시간들이 뒤엉켰다. 어떤 일도 한 인간에 대한 깊은 탐닉을 따라올 수는 없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탐닉의 끝에서 되새김질 되는 건 항상 나였다.

 

언젠가 개념미술가이자 퍼포먼스 아티스트인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퍼포먼스 영상을 본 일이 있다. 2010년 뉴욕 현대미술관 MoMA에서 진행된 그녀의 퍼포먼스는 매일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관객과 1분간 아무 말 없이 눈빛을 주고 받으며 진행되었다. 'The artist is present(예술가가 여기 있다)'라는 타이틀로 진행된 이 퍼포먼스가 이어지는 736시간 동안 MoMA를 찾은 관객은 뉴욕 시민보다 많은 850만 명이었다. 하나의 작품 속에 뉴욕이라는 도시 전체를 끌어들였다는 평이 이어졌다. 그녀는 "상대에 대한 아무 평가 없이 시간과 관심 그리고 사랑을 주는 것은 중요하다"며 "우리는 눈을 마주침으로써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게 되고 비로소 서로 연결된다"고 말했다.

 

퍼포먼스의 룰은 어떠한 신체적 접촉이나 대화 없이 상대의 눈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룰이 깨진 순간이 있었다. 독일의 퍼포먼스 아티스트이자 그녀의 옛 연인 울라이(우베 라이지펜)가 테이블 맞은편 관객의 자리에 앉은 것이다. 아브라모비치는 자신의 생일인 11월 30일에 네덜란드의 한 TV 프로그램에서 울라이를 처음 만났다. 공교롭게도 울라이의 생일도 11월 30일이었고, 아브라모비치는 할머니의 말을 떠올린다. "생일날 일어나는 일은 운명이란다." 두 사람은 10년간 연인으로 사랑을 나누며 함께 예술 활동을 했지만 1988년, 서로에게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음을 알고 이별하기로 한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The lovers(연인들)'라는 프로젝트를 함께하는데, 만리장성의 동쪽 끝과 서쪽 끝에서 각자 걸어오다 중간에 만나게 될 때 작별 인사와 포옹을 나누고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가는 것이었다. 이후 그들은 한 번도 다시 만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뒤 문득 뉴욕 한복판에서 재회한 것이다. 

 

아브라모비치는 갑작스러운 울라이의 등장에 잠시 놀라는 듯 하지만(울라이와의 만남은 미술관 측에서 그녀의 예술적 영감을 위해 준비한 이벤트였다고 한다) 이내 그의 눈을 바라보며 손을 내민다. 그들은 전시의 룰을 깨고 손을 마주잡고 짧은 인사를 나눈다. 그리고 약속된 시간이 지나자 남자는 일어서서 돌아서고 여자는 다시 자기 앞에 다가와 앉은 낯선 사람과 눈을 맞춘다. 이 영상의 배경 음악은 'How I Became The Bomb'라는 가수가 두 사람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Ulay, Oh'라는 곡이다. 모르고 들었을 때는 곡이 좋다고만 생각했는데 배경을 알고 들으니 기분이 또 다르다. 사랑이 끝나더라도 그것은 또 다른 형태로 남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