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사건들

헬싱키에 다녀왔습니다

sputnik.K 2017. 11. 29. 13:44

 

 

 

헬싱키에 다녀왔습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여행의 인상을 기록했습니다. 인상이 많은 도시를 여행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1. 길쭉한 도시

숲과 호수의 나라 핀란드. 이곳의 수도 헬싱키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본 건 나무들이다. 비행기가 반타 국제 공항에 착륙하기 전 창 너머로 내다보인 나무들은 녹색과 황금색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아직 계절을 결정하지 못한 듯 보였다. 나무는 여행지의 어떤 인상을 결정한다. 헬싱키의 나무는 길쭉하다. 길쭉한 생김새는 길쭉한 기분을 만드는 걸까. 헬싱키에는 긴 빗줄기도 자주 내린다. 사람들은 기다란 우산을 들고 기다란 장화를 신고 목도리를 길게 두르고 다닌다. 도로에서는 언제나 긴 트램을 볼 수 있다. 마치 네모의 꿈을 개사한 듯 길쭉함의 향연이 언제까지나 이어진다. 헬싱키의 어감은 또 어떠한가. 그야말로 '싱'과 '키'가 주는 길쭉함. 사람들도 길쭉하다. 팔 다리가 길쭉하고 얼굴도 긴 타원형이다. 가령 베트남 사람들이 갖는 '베' '트' '남' 스러운 동그란 생김새와는 다르다. 아참, 헬싱키는 지도에서마저 기다랗다.

 

 

  

 

2. 두 번째 빛의 시간

반타 공항에서 헬싱키 중앙철도역으로 왔을 때 인상 깊었던 것은 가로등이다. 헬싱키의 가로등은 서울에서 봐오던 거리등과는 달랐다. 빛은 건물과 건물 또는 기둥과 기둥 사이의 기다란 전선에 걸려 있었다. 바람이 불어도 조명은 불안한 기색 하나 없이 흔들흔들 그곳에 확실히 매달려 있다. 빛이 사라진 뒤 시작되는 빛의 시간이 있다. 해가 지거나 날이 흐려지면 시작되는 두 번째 빛의 시간. 몇 년 전, 남산에 올라 서울의 빛이 켜지는 시간을 지켜본 적이 있다. 미리 일몰 시간을 체크해 도시의 전경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서서 해가 지길 기다렸다. 어둠이 내리자 전광판에 가장 먼저 불이 들어왔다. 이후 가로등에, 각 건물의 창에 하나 둘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서울의 야경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바라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날 이후 종종 저녁이 오는 시간에 대해, 어둠이 내리는 과정에 대해서 생각하곤 한다. 어둠이 내려야 새로운 빛의 시간이 찾아온다. 헬싱키는 그 두 번째 빛의 시간이 긴 도시다. 해가 진 푸르스름한 하늘을 배경으로 노란 불빛이 하나 둘 들어오면 이곳의 저녁 풍경이 시작된다. 그 시간이 되면 우리는 도시의 또 다른 얼굴을 볼 수 있다.

 

 

 

3. 시나몬롤과 핫초코

10월 중순의 헬싱키는 쌀쌀하다. 산책을 하다 보면 따뜻한 시나몬롤과 핫초코 생각이 절로 난다. 마침맞게 어디선가 빵향기가 나면 곧장 그곳에 들어가 빵을 사서 베어 물어도 맛이 있다. 카페 레가타에서 시나몬롤과 핫초코를 먹은 날이 기억난다. 비가 내리고 쌀쌀했던 그날 레가타에 가기 위해 나선 산책로에는 날씨에 개의치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기를 유모차에 태운 사람, 자전거를 타는 사람,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사람, 그저 달리는 사람. 그들에게 비는 그저 비일 뿐이다. 날씨가 궂다고 해야할 일을 미루지 않는다. 왜냐하면 날씨는 날씨일 뿐이고 해야할 일은 해야할 일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나는 그러한 태도를 많이 본다. 비와 달리기 사이에 연결 고리를 만들지 않는 사람들의 표정이 옆을 스쳐지나간다. 그렇지, 그건 이유가 되지 못한다. 나는 빗속을 걸어 카페 레가타에 도착해 작은 문을 열었다. 그리고 시나몬롤과 핫초코를 주문한다.

 

 

 

 

4. 청어 아줌마

이번 여행은 언니네 부부와 함께 갔다. 우리는 헬싱키에서의 아침을 늘 따뜻한 차로 시작했다. 눈을 뜨면 포트에 물을 끓이고 주전자와 잔을 준비해 차를 내려 나눠 마신다. 그러다 배가 고파지면 간단히 아침식사를 준비한다. 주된 메뉴는 청어나 연어를 곁들인 샌드위치. 그리고 향긋한 딜이 빠지지 않는다. 마켓에서는 허브를 화분째 판매했는데 덕분에 필요할 때마다 화분의 딜을 조금씩 뜯어 신선하게 음식에 곁들일 수 있었다. 연어나 청어가 떨어질 때쯤에는 마켓스퀘어의 청어 아줌마를 찾아간다. 청어 아줌마의 가게에는 잘 손질된 생선과 해산물이 있다. 우리는 양파, 머스터드, 럼 등에 숙성된 청어 적당량과 연어, 문어, 그 외 몇 가지 소스와 치즈를 함께 산다. 마침 10월은 발트해 청어축제가 열리는 달이기도 해 풍성한 청어요리를 만나볼 수 있었다. 여기저기 노점을 구경하다 잔생선 무이꾸(muikku)에 맥주를 곁들여 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무이꾸는 핀란드 호수에서 잡은 민물고기로 크기는 멸치보다 조금 크다. 핀란드인들의 국민생선으로 버터와 기름에 통째로 구워 먹는 별미다. 형부님은 이번 여행에서 매일 헬싱키의 인상을 즉흥곡으로 녹음해 기록했는데 그 중에는 <청어 아줌마>도 있다. 멋있는 곡이다. 언니와 나는 듣기만 해도 "청어 아줌마!"라며 알아 맞힐 정도로 좋아한다. 그야말로 키스 헤링(kiss herring)의 시간이었다.

 

 

 

 

5. 앤티크 가게와 당근케이크

헬싱키 사람들은 중고품에 대한 인식이 남다르다. 도시 내에는 갖가지 형태의 앤티크 가게와 세컨핸드 가게, 특정 브랜드에서 직접 운영하는 리사이클 제품 판매소가 있다. 거리의 수많은 중고품 가게는 물건을 대하는 그들의 습관을 보여준다. 처음부터 제대로 된 물건을 만들어서 소중하게 사용하고 필요가 다 하면 다른 사람이 사용할 수 있도록 순환시키는 것이다. 중고품을 내놓는 것도 사들이는 것도 그들에겐 어색한 일이 아니다. 물건에 쌓이는 시간의 가치를 인정하는 그들의 문화를 직접 느껴 보고 싶던 차에 우연히 머리가 새하얀 할머니가 운영하는 앤티크 가게를 발견했다. 창가에 진열해둔 하얀 잔이 마음을 끄는 곳이었다.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그 잔을 카운터에 가져다두고 구석구석 구경에 나섰다. 신기하고 아름다운 물건이 많았다. 카운터 옆 의자에서는 할머니의 친구인 듯한 또 다른 할머니가 커피와 당근케이크를 먹고 있었다. 문득 배고픔이 느껴졌다. 잠시 후 주인 할머니가 당근케이크가 든 박스를 가지고 오더니 두 개를 집으라고 말했다. 사양하지 않고 언니와 하나씩 나눠 먹었다. 허기를 달래주는 달콤함이었다. 케이크를 어디에서 살 수 있는지 물어보니 "스톡만!"이라고 알려줬다. 근처 백화점 이름이었다. 우리는 할머니가 하나하나 튼튼하게 싸준 앤티크 그릇들을 손에 들고 스톡만으로 향했다. 그리고 작고 앙증맞은 당근케이크 여섯 조각을 사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6. 헬싱키는 깔롱 중

헬싱키를 다니면서 놀란 것 중 하나는 헤어살롱이 아주 많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깔끔한 헤어 스타일의 비결이 저 많은 미용실 수와 관련이 있나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헬싱키에 깔롱시티란 별명을 지어줬다. 깔롱이란 '멋을 내는 것'을 의미하는 경상도 사투리다. 경상도에서는 멋을 부리는 사람을 '깔롱쟁이'라고 부른다. 이 말이 사전에서도 검색이 되나 찾아보니 '요즘 진짜 깔롱쟁이들은 옷보다 그림을 산다'는 예문을 볼 수 있었다. 깔롱시티에는 멋진 물건도 많았다. 가구, 그릇, 패브릭, 커트러리 등 멋은 곳곳에 있었다. 여행 막바지에 반한 것은 신발이었다. 그곳에서 여름신발이라며 판매되고 있는 제품은 부드러운 소가죽이 발등까지 덮는 디자인이었다. 최소 늦가을용처럼 보였지만 분명 여름시즌 신발이었다. 여름에도 이렇게 견고한 신발을 신는구나. 그 견고함에 반해 신발 쇼핑에 나섰다. 신발은 튼튼할 뿐만 아니라 디자인적으로도 훌륭했다. 발을 감싸는 느낌도 편안했다. 그렇게 깔롱시티의 신발을 몇 켤레 사서 소중히 품에 안고 서울로 돌아왔다. 요즘도 신발을 신으면서 생각한다. 여전히 헬싱키는 깔롱 중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