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면일기

그것도 선심이라고

sputnik.K 2018. 5. 7. 17:05


어린 시절 우리 집에는 손님이 많이 왔다. 대부분 티타임을 즐기기 위해 찾아오는 엄마의 지인들이었다. 하교 후 집에 들어가면 식탁에 둘러앉아 있는 어른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은 식탁 위에 물컵이 놓여 있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오후의 풍경이었엄마는 집에 늘 많은 차와 커피를 구비해두었고 손님들은 엄마의 커피와 차가 유난히 맛있다고 말하며 즐거운 담소시간을 가지곤 했다.

 

확실히 엄마의 커피는 맛이 좋아서 나도 호시탐탐 어른들의 티타임을 노리곤 했다. 그러나 어린이에겐 커피 한 모금을 마시는 데에도 여러 어려움이 따랐다. 일단 카페인은 성장기에 해로웠다. 때문에 커피를 마실 수 있는 타이밍은 자주 찾아오지 않았다. 나는 손님 방문 시간을 집중 공략했다. 어른들 근처를 서성이다 대화가 삼매경에 빠질 때쯤 불쑥 엄마를 귀찮게 굴며 "커피 한 모금만"을 시전하는 것이다. 그러면 엄마는 인심 쓰듯 특별히 한 모금을 마시게 해줬다. 

 

당시 나의 커피잔은 잔받침대였다. 커피잔을 받쳐주는 그 넙적한 받침대 말이다. 엄마는 소량의 커피를 잔받침대에 부어주곤 했는데 아마도 어린이는 어른처럼 커피를 마실 수 없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암시적 행동이었던 것 같다. 지금에 와서는 '그것도 선심이라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당시 내게 잔받침대 커피는 무척 소중한 것이었다.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또 다른 타이밍은 일요일 부모님이 커피를 마시며 텔레비전을 볼 때였다. 그때는 엄마나 아빠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에이스 과자를 먹는 척 하면서 커피를 과자에 흡수시켜 먹으면 되었다. 때때로 더 많은 커피가 스미도 과자를 오래 잡고 있다가 과자가 흐물해져 커피 속을 떠다닐 때도 있었다. 그러면 "어? 과자가 빠졌네"라며 티스푼으로 커피와 과자를 함께 떠먹었다. 치사하고도 간절한 순간이었다. 엄마와 아빠의 커피 맛은 절반으로 뚝 떨어졌을 것이다.


이제 엄마는 커피 가루와 프림과 설탕이 들어간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엄마의 손님들도 더 이상 집에 오지 않는다. 그런 시절은 지나갔다. 손님들이 식탁에 앉아 하교하는 나를 반겨주던 시절 말이다. 물론 나도 이제 하교라는 걸 하지 않는다. 대신 엄마는 그때와는 다른 티타임을 가진다. 더 조용하고 소란스럽지 않은 시간일 것이라 짐작한다. 나도 중학생이 되면서부터는 받침대 커피에서는 서서히 멀어졌다. 그리고 이제는 핸드드립으로 내린 커피를 연하게 마신다. 나와 함께 잔받침대 커피 시절을 지나온 언니와 가끔 그때 이야기를 하곤 한다. "그때 기억나? 그것도 선심이라고." 그렇지만 사실 그렇게 향기로운 선심의 시절도 없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