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위험한 구절
집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외출 자체가 큰 스케줄이 된다. 꼭 나가야만 하는 일이 아니라면 일정을 무한 생략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집을 사랑하는 사람의 일이다. 그것은 하루에 두 번의 외출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단 외출을 했다면 계획했던 모든 일을 그 시간 안에 마무리하고 돌아오는 편이 좋다. 가령 '다시 집에 들러'라는 전제가 생기면 생각했던 일정이 꼬일 수가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일단 나의 계획은 오전 취재를 끝내고 바로 수영을 하고 원두를 사서 장을 봐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트북과 수영도구를 같이 가져가기에는 무리가 있어 일을 끝내고 다시 집에 들러 가방을 교체하기로 했다. 집에 들른다는 과정이 잠시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수영복과 세면도구를 잘 챙겨뒀고 난 나를 믿었던 만큼 내 의지도 믿었기에 아무런 의심없이 노트북만 챙겨 들고 외출을 했다. 그리고 계획대로 집에 들러 가방을 바꿔 나갔다. 그런데 문득 날씨가 무척 춥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런 날 수영을 하고 나오면 감기에 걸리기 십상이지. 나는 갑자기 동네 마트로 발길을 돌려 자연스럽게 장을 보기 시작했다. 의식의 흐름대로 갖가지 채소를 담고 손질된 닭과 와인도 한 병 골라 넣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낮잠을 잤다. 잠에서 깨자 보람찬 하루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던 하루가 개연성 없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역시 '다시 집에 들러'는 내게 위험한 구절이었다. 그렇지만 뭐 어떤가. 나는 요리 재료를 꺼내 손질했다. 집은 따뜻하고 내가 만든 음식은 맛있었다. 계획은 변경되라고 있는 것이고 일정은 꼬이면 꼬인대로 나름의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