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면일기

계획의 예고편

sputnik.K 2019. 6. 6. 21:18

 

오늘 만큼은 밀린 잠을 실컷 자고 싶었다. 하지만 평소처럼 새벽 6시가 되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가만히 누워서 생각한다. 나는 이렇게 피곤에 절어버린 새벽형 인간이 되었구나. 잠 기운이 전혀 남아있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둘러보다 책장 정리를 시작했다. 바닥의 먼지를 훔쳐내고 빨래도 두 번 나눠 돌렸다. 집안일을 마치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책을 뒤적이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깨어나 보니 오후 7시. 나의 주말이 잠에 모조리 삼켜졌다. 

 

오늘은 원래 어제 프리마켓에서 사온 노란호박과 아스파라거스, 바질을 슬슬 볶아서 먹을 계획이었다. 오랜만에 커피도 마시고 싶어 회사 근처 카페에서 원두도 사왔다. 하지만 낮잠을 자느라 어느 것 하나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다. 더 이상 뭔가 먹고 싶은 기분도 들지 않는다. 계획은 있었지만 그 일이 들어앉을 시간이 흘러가 버렸다. 역시 오늘의 일은 오늘의 방식대로 일어난다.

 

계획 세울 때의 감각을 좋아하는 내게는 늘 계획이 있는 편이다. 계획의 장점은 계획을 세울 때 이미 그 일을 한 듯한 성취감을 예고편처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구는 그것을 계획의 단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참고로 내게는 이런 계획도 있다. 할 일 없는 상태를 만들자. 무계획을 위한 계획인데 아스파라거스를 먹자는 계획보다 더 지켜지지 않을 확률이 크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생각하는 것도 멈춰야 하는데, 그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