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면일기
빵과 원두를 끌어안고, 안녕!
sputnik.K
2019. 8. 24. 16:08
전에 살던 집에 문제가 생겨 얼마 전 다시 이사를 했다. 차일피일 움직이는 걸 미루다 어느 날 불현듯 '이사를 하자! 지금!'이라는 느낌으로 순식간에 짐을 싸서 순간이동이라도 하듯 사는 장소를 바꿨다. 이제는 정리에 중독된 사람처럼 짐을 풀고 있다. 새벽이 되어서야 샤워를 하고 잠시 눈을 붙이다 회사에 간다. 작전상 후퇴라는 느낌으로 집을 떠나지만 이내 다시 돌아와 하던 일을 이어간다. 물건들에 제자리를 찾아주는 일 말이다. 한번 시작했다 하면 멈출 수가 없다. 힘을 그러모아 최선을 다한다.
오늘은 정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 느지막이 일어나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려 마셨다. 묵직한 커피향이 어수선한 주변 공기를 누그러뜨렸다. 이사를 하던 날 단골 카페에서 사온 원두다. 그날 나는 일찌감치 카페에 가서 원두를 사고 뜨거운 커피를 한 잔 주문했다. 늘 찾던 달콤한 커피 대신 드립커피를 시켰는데 적절한 산미가 입안 가득 여운을 남겼다. 돌아오는 길에 단골 제과점에 들러 빵을 사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10년간 한결같이 반복해 온 동선이다. 스쳐가는 풍경을 새삼스럽게 눈에 담으며 나의 오랜 동네에 안녕을 고했다. 모든 이삿짐이 트럭에 실리는 동안에도 빵과 원두는 어깨에 걸친 내 가방 안에 가만히 몸을 싣고 나와 동행했다. 빵과 원두를 끌어안고 가는 이사라니, 묘하게 든든하면서도 포슬포슬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