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면일기

오래된 빵집

sputnik.K 2020. 3. 23. 22:13

 

 

 

 

부모님 동네에는 오래된 빵집이 하나 있다. 어린 시절 외갓댁에 놀러갈 때부터 봐 왔으니 내 기억에만 30년 넘게 자리한 가게다. 어른들께 물어 보니 40년도 더 넘은 곳이라고 한다. 빵집의 주인은 부부다. 신혼 때 셋방살이로 시작한 자리에서 한결같이 빵을 만들고 팔면서 지금은 건물의 주인이 되었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이 빵집을 좋아하고 있다. 단골은 아니지만 장소에 자꾸만 애정이 간다. 성실한 사람들이 운영하는 오래된 빵집이 있다는 사실이 좋다. 

 

이곳은 새벽 6시에 문을 열고 밤 12시에 문을 닫는다. 당연히 밤 늦게까지 간판이 켜져 있다. '빵'이라는 한 글자가 정사각형 간판을 가득 채우고 있다. 간판에는 붉은색 불빛이 들어와 있다. 그 군더더기 없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빵'이라는 단어에는 힘이 있다. 부드럽고 단단하며 친절하고 성실한 힘이다. 가끔은 이유 없이 그 단어를 보는 것만으로 힘이 나기도 한다. 가게 내부에선 아늑한 노란빛이 새어나온다. 노르스름한 빵들이 진열돼 있는 선반을 노란 조명이 비추고 있다. 힘이 넘치는 빨간 간판과 대조적으로 실내는 따뜻한 노란 공기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가끔 이곳에서 빵을 사다 먹는다. 한 번은 친구가 근처에 놀러왔길래 도너츠를 사서 들려 보냈다. 오래된 빵집이라는 설명도 빼놓지 않았다. 얼마 전 아빠 생신 때는 이곳에서 딸기 케이크를 사 먹었다. 엄마는 "여기가 사실 케이크 맛집으로 유명했어"라고 말했다. 이 집 케이크를 사기 위해 먼 동네에서 찾아올 정도였다고 했다. 쉬는 날은 설날 하루 정도 뿐이고 남들보다 일찍 문을 열고 늦게 닫으니 자연스레 언제든 빵을 살 수 있는 집으로도 알려졌다. 아빠는 내가 빵집에 관심을 보이니 "큰 돈을 벌기 위해 장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말 그대로 성실하게 잘 살아가려는 사람들 같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결국 건물을 사고 장사를 이어가고 있으니 "성실함이 승리한 거지"라고도 덧붙였다.

 

오랫동안 자기만의 빵을 만들어 파는 기분이란 어떤 걸까. 물어보면 기분은 무슨 기분이요, 그냥 하는 거지라는 대답이 돌아올 것 같다. 나 역시 질문 대신 "찹쌀 도너츠 4개 주세요" 하고 값을 치르고 올 뿐이다. 그리고 밤에는 괜히 창문을 열고 빨간 불빛이 들어와 있는 '빵'이라는 글씨를 본다. 그러면 희한하게 외롭지도 쓸쓸하지도 않다. 12시가 다 되어 가지만 깨어있는 건 너 혼자만이 아니야 하고 말해주는 것 같다. 누군가의 성실함은 때로 깊은 안도감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