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 수학
신형철 평론가가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을 읽었다. 그는 '고통의 차별'에 대해서 말하며 "고통값에 비해 터무니없이 저평가되는 고통들이 있다"고 했다. 우리 사회는 피해자의 고통을 가늠하기 위해서 그 값을 계량하는데 대체로 이 측정 과정을 통과하면 피해자의 고통은 헐값이 되어버린다. 이 '법의 수학' 앞에서 우리는 한없이 무력해진다.
글에는 남성 제자에게 9년 동안 스토킹 범죄를 당한 여성 교사가 올린 국민청원 게시글이 언급된다. 고등학교 시절 담임교사를 스토킹하고 그 딸을 죽여 달라고 살인 청부까지 한 가해자에게 내려진 형벌은 고작 1년 2개월이다. 신형철은 "9년 동안의 지옥과 1년 2개월의 징역이 같은 값이라고 주장하는 법의 수학은 납득하기 어렵다"면서 "성착취나 스토킹의 대상이 되는 것과 살인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토록 다른 일인가"라고 묻는다.
고통에 대한 평가에는 오래된 차별의 동력인 무지함과 무심함이 기본값으로 작용한다. 말 그대로 피해자의 고통에 대한 '생각 없음'과 '마음 없음'이 깊이 있는 고려와 엄격한 잣대를 누락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동안 봐왔다. 어떤 피해자들의 고통은 사회적 계량기를 통과하면서 한없이 가벼워지도록 강요돼 왔음을. 무게뿐만 아니라 형태와 태도까지도 섣부르게 결정돼 다시 피해자에게 되돌아왔음을. 가해자에게는 '초범이라서', '나이가 어려서', '미래가 전도유망해서', '진지하게 반성하고 있으므로'와 같은 사실상 범죄 사실과 아무런 관련이 없고 심지어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엄격한 계도가 필요한 이유가 감형의 이유로 너그럽게 둔갑돼 적용되는 아이러니를. 피해자보다 가해자에게 감정이입을 한 사법부가 만들어내는 기울어진 죄와 벌의 사례들을 우리는 계속 봐왔다. 어쩌자고 우리 사회는 고통을 이렇게 차별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일까. 신형철의 글을 읽으면서 오랫동안 마음에 걸렸던 질문을 다시 마주한다. 칼럼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https://m.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004012041015
[신형철의 뉘앙스]고통의 사회적 위계
고통의 차별이 있다. 차별의 고통을 잘못 적은 것이 아니다. 차별이 고통을 낳는데, 그 고통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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