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면일기
우물이 된 구멍
sputnik.K
2020. 10. 16. 20:51
이번 한 주는 정확히 1부와 2부로 나뉘었다. 1부의 배경은 클로드 모네의 집과 정원이 있는 파리 근교의 작은 마을 지베르니 정도가 되겠다. 잔잔하고 평화로웠다는 얘기다. 그러나 2부에서는 갑자기 상황이 반전돼 그 정원에서 시계토끼가 튀어나와 내 멱살을 휘어잡고 끌고갔다.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는 바람에 몸은 휘청휘청하고 머릿속은 혼란스럽고 눈은 빠르게 스쳐가는 풍경에 피로해졌다. 모네의 정원과 시계토끼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말하자면 나는 새로운 시작 속에 있다. 다소 기쁘면서도 약간은 겁을 집어 먹고 엉거주춤한 상태다. 지금은 빨래가 동그랗고 일정하게 돌아가는 집 안에 있다. 그 작은 소음 속에서 나는 읽지 않고 책장에 꽂아두었던 책들을 잔뜩 꺼내기 시작했다. 해야할 일이 쌓여 있을 때면 어김없이 좁은 틈을 비집고 등장하는 청소 욕구와 독서 욕구다. 이들은 아주 작은 구멍만 있어도 그곳을 깊은 우물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 그러면 나는 영원히 주말만 보낼 사람처럼 그 속에 엉덩이를 밀어넣고 밍기적거리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순간, 가령 일요일 저녁 같은 것이 오면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우물에서 기어 나와 책상에 앉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은 빨래가 돌아가고 있고 나는 '그러나'라는 작은 접속부사에 기대어 읽지 않은 책의 첫 장을 펼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