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풍선 사이
고등학생 때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친구들과 집에 가는 길이었다. 늘 보던 빌라들 사이로 달이 보였다. 노랗고 동그랗고 공중에 떠 있는 달은 평소와 달랐다. 지나치게 컸고 그래서 너무 가까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한참을 달을 보며 걸었다. 그러다 친구에게 말했다. 저 달을 좀 봐. 친구는 내가 가리킨 방향을 쳐다보다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속을 것 같아? 무슨 말이야? 아니, 모델하우스 광고 풍선을 보고 달이라고 하면 내가 속을 줄 알았냐고. 그랬다. 그건 달이 아니라 노랗고 동그랗고 커다란 풍선이었다. 나는 진짜 달인 줄 알았어. 그러나 친구는 여전히 자기를 놀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집에 가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달 같은 풍선을 바라봤다. 내 눈에는 여전히 그것이 달처럼 보였다.
한 번씩 그때의 일이 떠오르면 묘한 기분이 든다. 친구에게 저 달을 좀 보라고 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까지도 '그날 달이 참 이상했어'로 시작해 '노란 달이 꼭 손으로 잡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었다니까'로 끝나는 에피소드를 안고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풍선을 달로 착각했다는 사실은 영원히 모른 채 그저 희한한 달을 본 날이라는 왜곡된 기억만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사실은 인생의 많은 부분이 그런 식으로 곡해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떠오른다. 나는 그 노란 풍선이 달이었다고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을 본 사람은 나 혼자뿐이고 장면은 바로 잡을 기회를 잃은 채 영원히 내 뒤에 있었을 테니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내가 보고 들은 것이라 할지라도 섣불리 단정하기가 어려워진다. 거기에는 중요한 확인 장치가 빠져 있을지도 모른다. 완전히 다른 해석이 가능해진다. 달과 풍선 사이에 서서 나는 그 서늘한 여지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