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면일기

코로나 시대의 성실한 피해자

sputnik.K 2021. 5. 24. 23:02

 

 

 

 

코로나 시대가 시작된 이후부터 나는 별 약속을 잡지 않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코로나 시대가 시작된 이후’라는 말이 꽤 거창하게 들리지만 그로 인해 생긴 수많은 변곡점을 생각하면 분명하고 확실하게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오늘은 1년 만에 친구와 약속을 잡았다. 작년 6월에 본 게 마지막이니 우리가 만난다면 거의 1년만에 보는 것이 된다. 1년 전 나는 내 친구의 직장동료이자 나도 아는 지인의 결혼식에서 부케을 받았다. 마치 운동선수처럼 기민하고 재빠르게 꽃다발을 받은 기억이 난다.

 

그 이후부터는 또 다시 성실한 거리두기와 부지런한 재택 근무와 무외식이라는 원칙을 지켜왔다. 나는 제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최대한 보수적으로 굴었고 많은 것을 자제하려고 애썼다. 되도록 예측 가능한 공간에서 시간을 보냈고 동선을 줄여나갔다. 친구는 이런 나를 '코로나 시대의 성실한 피해자’라고 불렀다. 확실히 그 말은 지난 1년 반 동안의 나를 잘 설명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 안에서도 나름의 과감한 시도는 있었다. 이를테면 셀프 미용이 있겠다. 나는 유튜브를 보면서 긴 머리카락에 직접 층을 내거나 숱을 쳤고 다른 날에는 더 대범하게 가위질을 하며 단발머리를 완성했다. 새로운 스타일은 기대 이상으로 마음에 들었는데 그건 기대라는 걸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맛볼 수 있는 기쁨이었다.

 

그렇게 한 해의 반절에 가까운 시간이 흘러갔고 남은 시간도 별다르지 않게 흘러갈 예정이다. 조금 다른 게 있다면 내가 먹는 일과 입는 일에 대해서 진지하고 새롭게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코로나 시대의 성실한 피해자는 이런 저런 변화와 생각들을 통해서 생활에 대한 인식과 방식을 천천히 바꿔나가기로 결심하고 있다. 조심스럽고 느리지만 나를 조금 더 좋아하는 방향이 될 것이라고 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