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을 긋다

소설책 읽는 시간

sputnik.K 2021. 9. 24. 23:47

 

 

 

 

어느 날 오후 우리는 퐁피두센터에서 비상설 전시회를 같이 보았다. 카키색 샤스커트에 겨자색 카디건을 걸치고 나온 언니는 나이에 비해 어려 보였다. 함께 전시를 본 뒤에는 걸어서 튈르리공원까지 갔다. 파리의 봄답지 않게 모처럼 햇살이 좋은 날이었고, 산들바람이 불어와 우리의 머리카락을 자꾸 흐트러뜨려 우리는 철제 의자에 앉아 웃었다. 그러고도 헤어지는 게 아쉬워서 다시 조금 더 걸어 교자와 라멘을 먹으러 일식당에 갔고, 그후엔 식당 근처의 작은 술집에서 맥주를 마셨다. 

- 백수린, 《여름의 빌라》, '시간의 궤적' 

 

소설책을 읽다 이국적인 단어를 보면 마음이 두근거린다. 퐁피두센터, 튈르리공원, 교자, 라멘이 그렇다. 이국적인 단어들이 나오면 혀 끝에 올리고 질감을 느껴본다. 알고 있던 이름이나 명칭도 소설에 등장하면 이전과는 다르게 다가온다. 나는 그것이 소설만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책을 읽을 때면 안과 밖에 있던 현실의 겹이 한 겹 벗겨지면서 일상의 감각이 새로워진다. 나는 소설 밖에서 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가 그곳 사람들과 날씨 이야기를 나누고 웃으며 그들이 하는 어떤 진실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 대화가 좋아서 마음에 부대끼는 일이 있을 때면 자주 소설책을 찾아든다. 

 

이번 추석 연휴에는 백수린의 책을 읽었다. 백수린의 단편들은 희붐한 빛이나 비 온 뒤 남는 습도 같은 것을 마음에 남기며 맺음하곤 했다. 나는 그의 단편에서 내가 한 번쯤 느끼곤 했던 마음들을 만났고 그럴 때마다 오래 그곳에 머물렀다. 황예인 문학평론가의 해설을 빌리자면 그건 그의 글이 "인간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빛뿐만 아니라 그림자 또한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때가 되면 우리는 옷가지와 부려놓은 짐을 챙겨들고, 열차에서 내린 후 영원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야 할 거예요. 풍화된 것들은 바람에 흩어져 없어지고 말겠죠. 그렇지만 나는 덜컹거리는 열차 위에 아직 타고 있고, 여전히 무엇이 옳고 그른지 당신이나 지호처럼 확신하지 못합니다.

- 백수린, 《여름의 빌라》, '여름의 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