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랜만에 편안하다는 느낌
기차가 서울권에 들어서자 풍경의 군데군데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다. 며칠 사이 서울은 체감온도 영하 26도를 오갔다고 한다. 파란 하늘과 근심 없이 흐르는 구름이 어쩐지 차가운 날씨와 보기 좋은 대비를 이룬다. 이런 날을 좋아한다. 기차가 녹색 철골구조물을 지나자 나는 비로소 서울에 돌아왔음을 실감한다.
집에 돌아오니 방이 냉골이다. 보일러의 온도를 높이고 엄마가 챙겨준 과일과 버섯과 떡국떡을 냉장고와 냉동고에 차례대로 넣는다. 손끝까지 시려 친구가 보내준 쌍화탕을 뜨겁게 끓여 밤과 대추 고명을 올려 호로록 마신다. 그래도 추위가 가시지 않아 주전자에 물을 데워 차를 연달아 내려마셨다. 저녁을 먹지 말까 고민하다가 한살림에서 사다둔 잣죽을 중탕으로 데웠다. 그릇에 담은 잣죽에 잣을 몇 알 더 올렸다. 따끈하고 포근한 하얀 잣죽을 천천히 떠 먹는 사이 몸이 데워진다.
잠들기 전 침대에 기대어 백수린의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을 펼쳤다. 백수린 작가는 ‘my favorite things’를 이야기하며 유리병에 담긴 꿀에 대해서 말했다. 나는 그가 말한, 비가 자주 오는 브르타뉴의 야생꽃과 햇살을 충분히 받은 시칠리아의 레몬꽃에서 채집한 꿀을 한 숟가락 퍼 먹는 상상을 해본다. 어쩐지 몸이 부르르 떨린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을 떠올려본다. 기분 같은 건 상관 않는다는 듯 쨍한 날씨, 뜨거운 김을 뿜으며 끓어오르는 주전자, 서서히 데워지는 방의 공기와 체온. 그렇게 나의 작은 공간에 스며드는 아주 오랜만에 편안하다는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