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소심한 성격을 가진 어린이는 소심해서 생긴 에피소드를 한 두 개 정도 가지고 자란다. 나의 소심한 에피소드에서 빠질 수 없는 이야기는 고구마 사건이다.

 

유치원에 다닐 때 체험학습으로 고구마를 캐러 간 적이 있다. 흙 속에 몸을 숨기고 있는 고구마를 캐내기만 하면 되는 비교적 단순하고 흥미로운 작업이었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선생님이 나눠준 작은 삽을 손에 쥐고 조용히 흙을 파서 고구마를 캐냈다. 캐면 캘수록 더 많은 고구마가 달려 나오는 것이 신기했다. 나의 바구니에는 많은 고구마가 쌓여 갔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런 류의 일 적성에 잘 맞았던 것 같다. 캐내면 캐어지는 일 말이다. 바구니 속 고구마를 봉지에 옮겨 담자 무려 두 봉지가 채워졌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선생님은 고구마가 무거우니 좌석 위에 있는 짐칸에 올려주겠다고 했다. 나는 "녜..."라고 대답했고 이윽고 버스에서 내릴 때가 다가왔다. 저 고구마를 내려달라고 해야 하는데... 마음이 두근거렸다. 결국 나는 그 말을 하지 못하고 버스에서 내렸다. 선생님도 잊어버렸는지 짐칸에서 내 고구마를 내려주지 않았다. 나는 집으로 터벅터벅 돌아와서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나 오늘 고구마 많이 캤어." 엄마가 칭찬과 함께 고구마는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모르고 버스에 두고 내렸어"라고 대답했다. 엄마는 "아, 아까워라"라고 했다. 아까웠다. 그리고 안타까웠다. 지금의 나라면 몇 번이고 크게 말했을 것이다. "선생님, 고구마 좀 내려주세요. 그 고구마는 내 고구마예요."

 

누구의 인생에나 하지 못하고 지나가는 말들이 있다. 입 속으로 삼켜지는 말에는 각자의 이유가 있다. 용기가 없어서 일 때도 있고 배려를 위해서 일 때도 있다. 나는 어쩐지 내 수많은 침묵의 말들이 어린 시절 고구마를 실어간 그 버스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니까 내게는 오래된 침묵의 나무가 있는 것이다. 형태를 갖추었지만 세상에 내놓지는 못한 말들이 매달려 있는 그 나무를 나는 가끔 가만히 떠올린다.  

 

 

 

'외면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세히 보면 보이는 것  (0) 2019.06.03
동작을 잠깐 멈추시오  (0) 2019.05.19
직장인의 점심시간  (0) 2019.04.05
다시 출근을 합니다  (0) 2019.02.23
좋은 도구를 사용한다는 것  (0) 2019.02.16
Posted by sputnik.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