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걷고 있다. 혼자서 교토 골목을 걷고 있다. 이곳에서 매일 신고 있는 신발은 천천히 낡고 있다. 어떤 날은 시장을 걷다 스시를 포장해 호텔방에서 점심으로 먹는다. 시장 어귀에는 목욕탕이 있다. 여행 첫 날 산책을 하다 우연히 발견한 곳이다. 무슨 용기였는지 그날 저녁 그곳 문을 열고 들어가 목욕을 했다. 작고 오래된 목욕탕이다. 온탕과 냉탕 사이에는 전기탕이 있다. 탕 벽에 'Welcome to heaven'이라는 의미심장한 글귀가 새겨져 있다. 탕에 몸을 담그면 거짓말처럼 전기가 찌릿찌릿 초겨울의 추위를 물리쳐준다.
나는 걷고 있다. 뉴욕의 대로변을 걷고 있다. 엄마와 언니와 함께다.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 몇 점이 경쾌하게 흐르는 초여름날이다. 우리는 휘트니 미술관에 가는 중이다. 그곳에서는 에드워드 호퍼 전시가 열리고 있다. 서늘한 미술관에 들어서서 호퍼의 그림을 바라본다. 채색 되기 전의 밑그림이다. 나는 그의 스케치본을 처음 본다. 처음부터 완성된 그림이란 당연히 없는데 나는 그 연필로 그린 그림이 신기하고 새롭다.
나는 걷고 있다. 제주도의 아스팔트 위를 걷고 있다. 친구들과 오름에 가기 위해 나선 어느 여름 날이다. 우리는 아마도 길을 잃었던 것 같다. 주변에는 사람 한 명 지나가지 않는다. 길 위에는 침묵이 흐른다. 땀을 흘리며 걷고 있는 우리의 허벅지와 종아리는 정오의 태양에 타들어가고 있다. 미지근한 바람이 불자 땀 냄새가 번져온다. 얼굴이 벌개진 친구들과 내가 걷는 길 위에는 아직도 낯선 열기가 가득하다. 목적지는 분명했지만 길을 헤매야 했던 그 날의 뜨거움이 가끔 생각난다.
나는 걷고 있다. 혜화동 사거리를 언니와 걷고 있다. 집 근처 단골 카페에 가는 길이다. 우리는 좋아하는 옷을 차려 입고 익숙한 횡단보도를 건넌다. 길의 배경은 여름이었다가 겨울이었다가 봄이었다가 가을이 된다. 카페에서 우리는 커피나 레몬차를 마시며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나눈다. 주변으로 듣기 좋은 음악이 흐른다. 어린 날 언니와 나는 자주 그런 나날을 보낸다. 우리가 카페시절이라고 부르는 시간이 비슷비슷한 듯 매번 다른 색채로 흥미진진하게 쌓여간다.
나는 요즘 대부분의 시간을 책상 앞에 앉아서 보낸다. 그렇지만 동시에 자주 길 위를 걷는다. 오늘 걷는 길이 내일 걷게 될 다른 길과 이어질 것이란 걸 길 위의 나는 아직 모르고 있다. 여행지의 길이 사실은 대부분 연결되어 있음을 나는 길 끝에 서서 알게 된다. 그곳으로 언제든지 돌아가 다시 걸을 수 있다. 우리는 가본 곳에 대한 기억밖에 가질 수 없다. 그래서 더 많은 길을 걸어둬야 한다.
'외면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파슬리만 없다 (0) | 2021.03.12 |
---|---|
각자의 존재방식 (0) | 2021.03.09 |
지금부터가 본 게임 (0) | 2021.02.13 |
어떻게든 안부를 나누며 (0) | 2021.01.01 |
네 계절이 지나는 사이 (0) | 2020.12.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