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과 슬픔의 통로

2021. 10. 18. 21:34 from 외딴방




몇 개월간 재택근무를 하다가 오랜만에 사무실에 모여 회의를 했다. 출근을 하려고 하니 준비부터 이동까지 2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그 동안 출근하는 데 걸리는 시간과 체력을 이만큼이나 아꼈구나. 회의는 30분이면 끝나고 이후에는 각자 일정에 맞춰 움직인다. 오늘은 회의가 끝난 뒤 프라이탁 매장에 잠시 들렀다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핫초코를 마시며 오전 마감을 했다. 회의를 하는 날이면 보통 아침 일찍 문 여는 카페에 가서 일을 하다가 점심으로 먹을 샌드위치를 사거나 비건 식당에 들러 그날 먹을 음식을 포장해온다. 오늘은 샌드위치를 사와서 먹었다.

저녁에는 꼬시래기에 김을 곁들여 맥주와 간단히 먹었다. 맥주를 마시면서 영화 <콜미 바이 유얼 네임>을 봤다. 알고 보니 예전부터 내 휴대폰 배경화면으로 설정해 둔 장면 속 책상이 엘리오의 것이었다. 책상 앞 세로로 긴 창 밖으로 여름나무가 무성하고 책상 위에는 타자기와 카세트 플레이어, 연필꽂이, 향수, 펼쳐진 노트, 불 켜진 조명이 있다. 친구가 언젠가 그 화면을 보며 "멋지다! 네 책상이야?"라고 물었을 때 "아니, 누구 책상일까?" 하며 궁금했는데 드디어 궁금증이 해결됐다. 엘리오의 책상은 내가 갖고 싶은 책상과 닮아 있다. 크고 투명한 창과 그 너머에 있는 나무들이 그렇다. 창은 반쯤 열려 있다.

그렇게 멋진 책상을 가진 엘리오는 영화에서 그보다 더 멋진 사랑을 한다. 영화 속에서 엘리오의 아버지는 사랑을 했고 이별을 한 17살 아들에게 말한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단 한 번만 주어지지. 그런데 네가 그것을 알기도 전에 마음은 닳고 지쳐버려. 몸도 마찬가지야. 슬프고 아프겠지만 지금의 슬픔과 괴로움을 무시하지 말거라. 네가 느꼈던 기쁨도 함께 말이야." 슬픔을 지우기 위해서 기쁨도 서둘러 퇴색시켜버린 경험이 있는 사람의 말이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 마음은 빠른 속도로 닳아버리고 슬픔과 기쁨을 예전처럼 감각할 수 없게 된다. 슬픔도 괴로움도 그들 나름대로 나를 자유롭게 드나들게 놔둬야 한다. 그래야 기쁨과 환희도 그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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