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맛은 누구신가요?

2023. 4. 12. 18:12 from 외면일기

 

 

 

 

조카의 말은 쌉싸래한 어른들의 세계에 언제나 하얗고 부드러운 우유 한 방울의 모습으로 떨어져 내린다. 가령 맛있는 음식을 한 입 먹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 맛은 누구신가요?"라고 묻는 천진난만함이랄지 '관심없어'를 "간식없어"로 말해버리는 쿨함은 맛과 관심에 대한 기존 이미지를 환기시켜 버린다. 언니의 차가운 손을 만지면서는 "엄마 손이 겨울이야"라고 말하고 조금씩 따뜻해져가는 손을 보면서는 "점점 봄이 오고 있어"라고 표현해 손에도 계절이 오간다는 것을 알려준다. 가족들이 맥주 담은 잔을 손에 들고 짠을 외치려 하면 "아니야, 아니야, 물 갖고 와. 짠 하고 싶어"라고 거들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아직 영글지 않은 발음으로 '소스'를 "소시"라고 '미꾸라지'를 "미끼라지"라고 말할 때는 가족 모두가 입꼬리를 올리고 앞다퉈 비무장지대로 들어선다.

 

그런 조카에게는 한결 같이 애정을 건네는 대상이 있는데 바로 빨간 청소기다. 그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관심을 보이던 빨간 청소기는 '동동기'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조카로부터 넘치는 사랑을 받아왔다.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동동기를 찾을 정도로 빨간 청소기에 대한 조카의 사랑은 남달랐다. 그러던 어느 날 조카의 깊은 애정공세에 어쩔 줄 몰라하던 동동기의 목이 부러지는 참사가 발생했다. 가족들은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며 동동기의 창고행을 결정했다. 그러나 동동기의 거처가 안방이든 창고든 한번 시작된 사랑은 멈출 줄 모른다. 조카는 틈이 날 때마다 "할머니, 동동기 보러 갈까?"라고 말하며 엄마의 손을 잡고 창고로 간다. 그곳에서 그는 더없이 다정하게 말한다. "동동기야, 얼른 나아라아. 우리 곧 다시 만나자아." 엄마는 동동기를 보고 싶어하는 조카의 애달픈 마음이 옆에서 보기 가슴 아플 정도로 진심이라고 전한다. 그러니까 그의 말과 마음은 언제나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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