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트 무질의 《소년 퇴를레스의 혼란》을 읽다가 회색 먼지가 날리는 배경의 텁텁함에 괜히 입안이 깔깔해지는 것 같아 책을 덮고 일기장을 펼쳤다. 내 일기장의 첫 페이지에는 무려 7년 전에 쓴 일기가 기록돼 있다. 오늘 아침에도 이 일기장을 썼으니 나는 꽤 긴 시간 동안 나름의 근근함으로 기록을 이어온 셈이다. 7년 전의 나는 지금보다 더 올바르고 구조적이며 좋은 사람에 가까웠던 것 같다. 고민은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해결책도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일기장에는 2017년 혼자 떠난 일본여행의 기록이 있다. 여행 둘째 날 키타오지 역에서 내린 나는 식물원에 가고 싶었다. 마침 가려던 카페가 아직 문을 열기 전이다. 하지만 지도에서 식물원은 멀어 보인다. 나는 일단 카모강을 따라 산책을 하자고 생각한다. 길을 걷는데 나무와 나무의 사잇길로 미끄러지듯 들어가는 아저씨가 보인다. 그를 따라가 본다. 수많은 분재와 비닐하우스가 있는 곳이다. 그곳을 서성이고 있으니 초소형 자동차를 탄 여성이 부우웅 내게 다가온다. 여기 있으면 안 돼요, 프라이빗 존! 그러면서 티켓과 맵을 보여달라고 한다. 나는 횡설수설하다가 떠듬떠듬 사실은 식물원에 가고 싶다고 말한다. 그녀는 나를 의아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여기가 식물원이에요!

 

그러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고 싶었던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는 그런 기록. 홀로 떠난 여행길은 홀가분했고 동시에 아름다운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이상하게 아끼는 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는 말들. 여행의 말미에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자고 쓰고 있었다. 펜 끝에는 분명한 힘이 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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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putnik.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