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 길. 배수아의 책을 읽는다. 《밀레나, 밀레나, 황홀한》에 실린 두 편의 단편소설 가운데 한 편인 '영국식 뒷마당'은 예전에도 한 번 읽은 적이 있다. 한 번 읽었다고 해서 흥미롭지 않은가 하면 그렇지 않다. 오히려 반갑다. 짧지만 간단치 않은 소설 속 단어들의 배열이 기다려진다.
먼저 수록된 '밀레나, 밀레나, 황홀한'에는 욕조에서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주인공이 나온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커피를 만든다. 그가 커피를 만드는 방식에는 한 번쯤 따라해보고 싶은 구석이 있다. 곱게 간 커피 가루에 팔팔 끓인 물을 붓고 가루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시는 방식이다. 이 커피는 "약간의 커피 입자가 입속으로 흘러들어" 오지만 기계를 통과해 생기는 "전기적 열의 잔흔이 강하"게 남는 커피는 아니다.
험윤은 느리게, 아주 느리게 커피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을 즐긴다. 처음에는 아주 진한 농도에서 시작하여 점차 연해지는 농도의 순서로. 처음에는 따뜻한 커피로 시작해서 점차 불균일하게 식어 가는 온도의 순서로. 식은 커피는 그에게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거슬리는 것은 오직 기계를 급속하게 통과하느라 금속과 고무 패킹, 녹 찌꺼기의 맛이 진하게 달라붙어 있는 커피이다. (중략) 만약 산비둘기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화창한 날이라면, 그는 잔을 창가 탁자 위에 놓아둔다. 커피가 아침 햇살을 받을 수 있도록. 커피가 산비둘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식은 커피는 그에게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 배수아, 《밀레나, 밀레나, 황홀한》, '밀레나, 밀레나, 황홀한'
출근 길. 나는 식은 커피를 문제 삼지 않는 소설 속 남자에게 흥미를 느낀다. 자연스럽게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는 커피 가루의 고운 입자는 그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작가는 네 페이지에 걸쳐 이 남자가 커피를 어떻게 마시는지에 대해서 쓰고 있다. 한 쪽 두 쪽 세 쪽 네 쪽을 다 읽고 나자 마치 내가 "검은 진흙" 같은 커피에 뜨거운 물을 더해가며 마신 듯한 기분이 든다. 이윽고 그가 커피 마시기를 끝내고 "운동화 끈을 매고 집 근처 공원으로" 나가자 나도 가루만 남은 커피잔을 내려놓고 지하철에서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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