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파치노처럼, 후아!

2011. 10. 12. 22:20 from 외딴방

 

토요일에 TV를 켰는데 <여인의 향기>가 방영되고 있었다. 프랭크 슬레드(알 파치노)와 찰리 심스(크리스 오도넬)가 뉴욕으로 여행을 간 이후의 장면이었다. 화면에는 추수감사절을 맞아 형의 집을 방문한 슬레드에 대한 가족의 불편함과 냉대가 그려지고 있었다. 그 유명한 탱고 씬, 빨간 페라리를 모는 씬, 학교에서 곤경에 빠진 찰리를 변호하며 갈채를 받는 씬은 여전히 좋았다. 그런데 두 번째로 영화를 보자 슬레드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후아!"라는 말이 귀에 들어왔다. 그의 감정 변화가 그 말을 통해 느껴졌다. 

 

 

 

 

두 번째 보게 되면서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어릴 땐 같은 책과 영화, 드라마를 몇 번씩이나 질리지 않고 봤던 것 같은데, 이제는 잘 안 된다. '이미 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안다는 사실이 그것에 대해 정말 알 수 있는 기회를 막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그 책을 읽었다고 해서 그 영화를 봤다고 해서 그 장소에 갔다고 해서 내가 그 책과 영화와 장소를 아는 건 아니다. 읽었고, 봤고, 갔다는 팩트일 뿐. 그래서 나는 '안다'라는 말에 점점 조심스러워진다.

 

돌이켜보면 어릴 때부터 "걔는 내가 아는데"로 시작되는 말을 싫어했다. 과연 누가 누굴 알 수 있다는 것인지 의아했다. 가지고 있는 천성이라는 것은 있겠지만 결국 보여지는 일부로 전부를 아는 체하는 것 같아서 신뢰가 가지 않았다. 심지어 가족들조차 서로에 대해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초등학교 때, 시험 시간이 끝나는 종소리를 듣고 연필을 놓아서 답안지에 답을 적지 못했던 적이 있었다. 종이 치는 것과 관계 없이 답을 적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것에 대해 엄마가 "워낙 순진해서"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이상하게 그 말을 듣고 기분이 나빴던 것으로 기억된다. 순진하다는 말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라기보다는 나에 대한 어떤 식의 정의가 기분 나빴던 것이다. 사춘기 시절의 과잉반응이라기에는 무척 진지하게 오랫동안 그런 식의 말에는 거부감이 느껴졌다. 내게는 그 모습만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두 번째 본 영화에서 처음 봤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여서 다시금 결론은 서둘러 내리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다시 여인의 향기로 돌아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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