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디 자라는 소리

2011. 11. 13. 23:49 from 외딴방
 

 

 

 

 

Splendor in the Grass - Pink Martini

 

 Life is moving oh so fast 

I think we should take it slow

rest our heads upon the grass

and listen to it grow

 

 

"rest our heads upon the grass and listen to it grow"라는 가사 뒤로 차이코스프키 피아노 협주곡 제1번 1악장의 도입부가 삽입되었다. 이 곡은 우연찮게 박웅현 CD님의 강연에서 알게 되었고 또 그의 책 『책은 도끼다』에도 언급되는 노래다. 잔디 자라는 소리라니, 그 노랫말 이후 흘러나오는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은 언제나 언제나 그를 소름돋게 만들었다고 했다. 잔디가 자라는 속도. 어떻게 하면 그 속도에 내가 온전히 편입될 수 있을까? 그것이 그의 인생을 움직인 질문이라고 했다.

 

잔디에게 자라는 소리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모든 것은 자란다. 잔디도 나무도 고양이도 나도. 모든 것은 소리를 갖는다. 이건 다른 이야기지만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다. 어릴 때 잠을 자는데 어디선가 투둑 따닥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불 속으로 잔뜩 몸을 웅크리고 눈을 꼭 감았다. 소리가 날 리 없다고 생각했다. 방에는 나 혼자만 있었고, 소리를 낸다면 그건 내게서만 나야한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부모님께 어젯밤 방에서 투둑 따닥 하는 소리가 몇 번인가 났고 뭔가 이상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아빠가 말씀하시길, 가구가 움직인 것이라고, 엄마가 거들길, 벽도 움직인 것이라고 했다. 세상에, 가구가 게다가 벽도 움직인다니! 가구도 벽도 밤이 되면 몸을 들썩인다. 낮에도 들썩일테지만 모든 것이 고요해지는 밤이 돼야 그들이 움직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렇게 아귀를 다시 맞추기도 하고 틈을 좀 더 벌리기도 한다. 방 안의 모든 것이 살아있다. 이 방 안에 있는 춤베(춤추는 산세베리아), 양금이(천양금), 운각이(백운각), 몽챠린(기린조각), 몽챠코(코끼리조각), 또또로(토토로 발토시), 나무책상, 문까지 모두 살아있다! 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덜 외로워진다. 그들도 티나지 않게 자라고 움직인다. 내가 잠들면 <미녀와 야수>의 주전자 모녀처럼 깨어나 신나게 놀지도 모른다. 잔디 자라는 소리에서 비약적으로 주전자 모녀 이야기까지 흘러왔지만 결론은 잔디 자라는 소리를 들어볼래? 라고 물어봐주는 저 친절함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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