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중반 이후부터 나는 여름이 덥지 않았다. 언제나 몸을 식혀주는 사무실 안에서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허여멀건한 피부를 보호할 수 있었다. 올해는 태양 아래서 살갗이 탄다는 느낌을 받으며 땀으로 젖었을 때의 기분을 느껴보고 싶었다. 다행히 나의 살갗은 의도대로 확실히 타주었다.
요즘 내가 하는 일은 이렇다. 느지막이 일어나 테이블 위에 놓인 바나나를 하나 뜯어 먹으며 베란다 창에서 내다보이는 야외수영장을 관찰하는 것. "언니, 오늘은 17마리 있어." 말하다가 가끔은 수영장 마감 1시간을 남겨두고 수영복과 수건 등을 주섬주섬 챙겨서는 그 중 한 마리가 되는 것. 물고기처럼 유영하면서 나는 바닷바람을 생각한다. 얼마 전 내 인생을 스치고 지나간 그 바람을 떠올린다. 그것은 마치 오래 전부터 그러길 기다렸다는 모양새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불어오더니 아주 자연스레 어디론가 불어나갔다. 그 바람은 기어코 꼭 지나야 하는 자리인 양, 내 몸을 훅 끼치고 지나가며 많은 시절의 기억도 함께 가져갔다. 어쩌면 처음부터 잘못된 기억이었을지도 모를 파편들 말이다. 그리고, 그렇다. 불어나간 건 불어나간 것이다.
나는 가끔 심약한 생각에 젖어드는 인간이지만 수영장에선 뭔가를 부풀리고 오해할 여지가 없다. 그저 물 속에 몸을 담그고 수영장 바닥에서 뿜어져 나오는 노란 조명을 발바닥으로 가리거나 팔을 이리저리 저어볼 뿐이다. 한번은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는데 데이비드 호크니의 그림 속 남자가 내 앞을 유유히 유영해가는 것을 보았다. 내가 가만히 수영장 벽에 기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아파트의 불켜진 방들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그 남자가 스윽 내 앞을 지나갔다. 그것도 두 번이나. 나는 그를 볼 수 있었다. 언니가 보여준 그림 속 모습 그대로였다.
헤엄치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들이 물고기와 다르지 않다는 기분이 든다. 나는 물고기를 좋아한다. 심지어 그들의 미간까지도 사랑한다. 물고기는 우아하다. 그들을 제대로 관찰해본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그 사실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내 첫사랑은 물고기를 닮았었다. 특정한 어종이 아니라 그저 '물고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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