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니는 아들과 산책 중이었다. 우리는 처음에 안녕? 하고 짧은 인사를 나눴다. 나는 길가에 핀 꽃을 카메라에 담으며 돌아다녔고, 그는 자신의 작고 귀여운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아들이 타고 있는 자전거 뒤를 천천히 따라 걸었다. 산책로는 넓지 않았고 우리는 길에서 다시 마주쳤다. 그는 은행원이었다. 지금은 홍콩에서 일하고 있지만 이전에는 런던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레니는 홍콩의 날씨는 좋아하지만 이곳에서의 일은 런던에서보다 힘들다며 울상을 지었다. 그리고 "And you?"라는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정보는 들은 만큼 돌려줘야 한다. 나는 현재 휴가 중이고, 글을 쓰고 있으며, 오늘 산책이 끝나면 요리를 하고 청소를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내일이면 돌아간다고 덧붙였다. 몇 가지는 사실이고 몇 가지는 거짓이다. 나는 그에게 "나 오늘 너 만났다고 쓸 거야."라고 말했는데 그건 사실이다. 보다시피 나는 약속을 지켰다. 그의 어린 아들도 내게 인사했는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사실 레니라는 이름도 대화하는 내내 마음 속으로 외우려고 노력한 결과 기억할 수 있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이름과 얼굴 같은 건 금방 까먹어 버린다.

 

레니와 헤어지고 벤치 팔걸이에 몸을 기댄 채 책을 읽고 있는데,에서 터덜쿡 터덜쿡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누군가 큰 개를 산책시키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벤치 옆을 지나간 것은 덩치 큰 필리핀 여자였다. 흰 티셔츠를 입고 엄지 발가락만 감싸는 조리를 신은 그녀는 터덜쿡 터덜쿡 내 확신을 비껴 걸어갔다. 그렇게 나를 비껴 걸어간 존재가 어디 그녀뿐일까마는, 나는 새삼 눈을 크게 뜨고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봤다.

 

가끔은 짧은 시간 불특정한 누군가와 나누는 것들(예를 들어, 정서와 표정 같은)이 긴 시간 알아온 사람들과 나눠왔던 것보다 더 다채로워 나를 깜짝 놀라게 할 때가 있다. 세상에는 시간의 장단과는 관계 없는 것들이 많은 것 같다. 가까이 지내왔지만 단편적인 정보조차 나눌 수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깝지 않아서(물리적인 거리를 포함한) 속마음을 말하게 되는 사람이 있다. 곁에 있는 사람들과 아무리 나누려 해도 나눠지지 않았던 것들이 순식간에 이방인에게 흘러가버리는 것이다. 어쩌면 나누려는 행위 자체가 잘못된 건지도 모른다. 그저 많은 것들이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 노래를 부르듯 내 곁을 지나가는 중인데, 나만 그걸 모르고 "아, 저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인데요." 말을 걸다 결국 지나가버린 뒷통수만 보며 어안이 벙벙해지는 것이다. 저 앞에서 이런 말이 들리는 것도 같다. "우물쭈물하다간 큰일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비껴 가는 것이 있다면 비껴 가는대로 내버려 두면 된다. 사람이든 예상이든. 이상할 게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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