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의 10일

2013. 3. 15. 17:14 from 작은 사건들


얼마 전 병원에서의 생활이 생각난다. 고작 열흘 간이었지만 환자복에서 나던 세제 냄새나 블라인드 뒤 창에 붙어 있던 '입'이었나 '원'이었나 했던 글자(아마도 입원실 중 하나의 글자), 그리고 4인실임에도 퇴원 때까지 비어있던 세 개의 침대에 대한 이미지 같은 것들이 간혹 생각난다. 그 중에서도 병원에서의 식사나 매일 병문안 오던 언니, 4인실에서 혼자인 기분에 대해서는 좀 더 이야기하고 싶은 기분이 든다.


당시 부모님과 나는 차 사고로 각각 부산과 서울에서 입원 중이었는데, 매일 하는 통화에서 늘 빠지지 않았던 주제가 오늘은 뭘 먹었는가였다. 엄마는 내가 병원 밥을 잘 먹지 못할까봐 걱정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먹고 자는데 있어서는 까탈스러운 인간이 아니라 그다지 고생스럽진 않았다. 단지 열흘 동안 매 끼니마다 흰 쌀밥만 먹었던 탓에 퇴원 후 한동안 달짝지근한 밥은 먹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입원 당시 언니가 매일 딸기와 간식을 사들고 왔는데, 언니가 오면 딸기를 나눠 먹으며 오늘은 오전 물리치료가 어땠고 물리치료사들이 '내딸 서영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엿들었는데 복선이 어쩌고 저쩌고 하며 시시껄렁한 것들에 대해 말하곤 했다. 암튼 즐거웠다 할 수도 없고 괴로웠다 할 수도 없는 시간들이 지나고 나니 어쩐지 딸기를 먹으며 "언니 내일은 몇 시에 올 거야?" 물었던 순간이 새록하다. 매일매일 딸기와 국과 반찬들을 싸들고 병문안 온 언니에게 고개 숙여 감사한다. 


언니가 가고 나면 4인실에 혼자 덩그러니 남는데, 당직 간호사가 혈압을 재고 주사를 놓고 나가면 밤새 누가 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에 문을 꼭 잠그고 있어야 했다. 내가 4인실을 혼자 쓰는 것을 보고 간호사 언니는 내가 의사 선생님의 지인인 줄 알았다고 한다. 공간을 혼자 쓰는 건 편했지만 침대 세 개가 비어있다는 사실이 떠오르는 밤은 조금 무서웠다. 시간은 부드럽고 명확하게 흘렀고 나는 그저 아침 먹고 물리치료, 점심 먹고 물리치료, 저녁 먹고 잘 준비로 하루를 보냈다. 그 사이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하는 행위들도 일어났지만 어쩐지 모든 일이 세 끼 식사 시간에 맞춰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희한한 경험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벌써 옛날에 있잖아, 하며 시작하고픈 이야기처럼 멀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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