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폭포와 눈썹달

2013. 12. 20. 02:16 from 작은 사건들

 

지난 여름 부모님과 등산을 다. 안동마을을 지나야 나오는 청량산에서의 새벽 등반을 위해 새벽 2시 30분에 일어나 차를 타고 이동했다. 새벽 길은 어두웠다. 나뭇가지 너머 성글하니 떠오른 눈썹달 하나만이 우릴 따라오고 있었다. 청량산에 도착해 코스를 정해 걷다 보니 어느덧 정상이었다. 그곳에서 돗자리를 펴고 미리 싸온 집밥을 상추며 찐 호박이파리에 한 덩이씩 놓고 쌈장 한 젓가락, 김치 한 조각을 올려 입에 넣고 꼭꼭 씹었다. 바람이 달큰한 땀을 식혀주고 밥 덩이가 넘어갈 때마다 가슴에 맺힌 뭔가가 조금씩 섞여 꿀떡꿀떡 내려갔다.

 

그날은 운무 가득한 하루였는데, 청량산에 위치한 청량사도 운무에 둘러싸여 있었다. 보이는 돌무덤마다 작은 돌을 하나씩 올리며 각기 다른 소원을 빌고 내려왔다. 그리고 실폭포를 만났다. 아빠가 "저기 실폭포다!"라고 해서 본 곳에는 하얀 명주실 타래 같이 매끄러이 떨어지는 물줄기가 있었다. 그 줄기 한 자락을 댕강 잘라 목 뒤에 품고 왔다. 서늘하고 시원하다. 그 물줄기는 여기 있지만 동시에 거기도 있다. 폭포 사이로 새벽에 본 눈썹달도 숨겼다. 살그머니 실폭포를 걷으면 눈썹달이 수줍게 떠있다. 나는 그렇게 그날 운무로 가득 싸인 기암괴석 밑으로 흐르던 실폭포 아래 어떤 마음을 묻고 대신 폭포 줄기 한 자락을 얻어온 것이다. 얻어온 것은 때가 되면 언젠가 돌려주러 갈 것이다. 눈썹달도 그때가 되면 제자리를 찾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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