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과거 자신의 모습을 폐기 처분하는 시기가 온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에서 '벌써 폐기 처분해 버린 옛날의 모습'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 문장이 마치 복채를 받은 점쟁이처럼 "너도 이전의 너를 폐기 처분해 버렸지?" 하고 묻는 느낌으로 다가와 나는 조금 움찔했다. 소설 속의 나는 내가 진작에 폐기 처분한 옛날 모습을 찾는 가족들을 위해 과거를 복기해 연기한다. 나라면 손사래를 치며 그런 건 진작에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렸다고 할 것 같은데 말이다. 그로 인해 상대가 배신감을 느낀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그건 내가 상관할 감정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옛날 모습을 폐기 처분하는 것이 과거에 대한 안면몰수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나름대로 균형을 잡기 위해 힘을 내고 있는 것 뿐이다.
그리고 시간이 남아(요즘은 시간이 많이 남는다) '아줌마와 아저씨의 시간은 언제 오는가'에 대해 생각해 봤다. 내 생각에 소녀가 아줌마가 되고 소년이 아저씨가 되는 시간은 수줍음을 잃을 때 비로소 오는 것 같다. 결혼이나 자녀의 유무가 기준이 되지는 않는다. 어린이가 젖니를 잃고 청소년이 되는 것처럼, 청소년이 목소리를 잃고 어른이 되는 것처럼, 소년은 수줍음을 잃고 아저씨가 된다. 그들은 각자 젖니 대신 영구치를, 가는 목소리 대신 굵은 목소리를, 수줍음 대신 뻔뻔함을 얻는다.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법이니까.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며 시절은 지나간다. 살다보면 수줍음 같은 건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고 느껴지는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세상에 덜 신경쓰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절실해지는 건지도. 그런 때가 오면 내 안의 소년(소녀)에게 뜨겁게 안녕을 고하는 것이다. 안녕, 나는 이제 아저씨(아줌마)가 되려 해. 그렇게 수줍음이 젖니처럼 뽑혀 나갈 때 아줌마와 아저씨의 시간은 오버랩돼 오는 게 아닐까.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수줍음은 애초에 뽑혀 나가도록 만들어진 젖니와는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선택할 수 있다. 버릴 것인지 간직할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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