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 대한 과도한 자의식을 가진 사람들을 마주할 때가 있다. 그들은 툭하면 말한다. "나는 예술하잖아." 또는 말한다. "나는 예술가잖아."
곰곰이 생각하면 그렇게 재미난 말도 없는 것 같다. 사람들은 제각기 세상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나는 그걸 하잖아."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가령 나는 내게 중요했던 사람들, 1년 전 내 컴퓨터를 고쳐줬던 사람이 "나는 엔지니어잖아."라고 말하거나 내게 눈물나게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준 요리사가 "난 요리하잖아."라고 말하는 걸 들은 기억이 없다. 그런데 유독 예술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 중 몇몇이 자신의 일을 강조해 말하는 경우는 많았다. 그들의 과잉된 의식은 자주 나의 어안을 벙벙하게 만들곤 했는데, 마치 예술 아래 모든 것이 있다는 듯한 태도 때문이었다. 그들은 자기 일에 대한 애정을 다른 일에 대한 타박으로 드러내곤 했다. 그런 자세는 곤란하다. 무엇보다 그런 사람들은 많은 경우 예술가가 아닌 기술인일 때가 많았는데 정작 본인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는 얼마 전 어떤 분야의 언저리에 '나는 아티스트'라는 동굴을 만들어놓고 그 안에서 십 년 넘게 질 떨어지는 결과물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는 일을 하는 사람을 봤다. 그 결과물들은 그에게 약간의 유명세와 일회성 인간관계들을 안겨줬지만 들여다보면 알맹이는 없고 신경질적이고 작위적인 껍데기만 날릴 뿐이었다. 나는 그 동굴 속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파스칼 키냐르의 『세상의 모든 아침』에서 본 글귀가 떠오른다.
"자넨 음악은 하네만, 음악가는 아닐세."
비올라 다 감바의 거장 생트 콜롱브가 음악가로 명성을 떨치며 신이 나서 악기를 연주하고 다니는 그의 제자에게 하는 말이다. 이후에도 그는 몇 번인가 제자에게 같은 뉘앙스의 말을 전한다.
"자네는 몸의 자세를 알고 있네. 연주에 감정도 부족하지 않고. 가볍게 활을 놀리고 잘도 퉁기지. 왼손은 다람쥐처럼 날쌔고, 생쥐처럼 잘도 내빼지. 꾸밈음은 기가 막히고 때론 매력적이지. 하지만 난 음악은 듣지 못했네."
"자네는 춤추는 사람들이 춤추게 도와줄 수는 있네. 무대에서 노래하는 배우들의 반주는 할 수 있겠지. 자네 벌이는 할 걸세. 음악에 둘러싸여 있겠지만, 그러나 음악가는 아니네."
생트 콜롱브는 제자에게 기교가 아닌 본질에 다가서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의 말에 깊이 동감한다. 어떤 일이든 본질에 들어가면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게 된다. 그저 그 순간에 존재할 뿐이다. 모든 일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다. 그 어떤 일도 다른 일의 상위에 존재할 수는 없다. 예술은 바다 위에 홀로 떠 있는 외딴섬이 아니다. 예술이 인간에게 준다고 알려져 있는 위로와 감동도 예술이 아닌 생활에서 얻을 때가 많다. 앤디 워홀의 관점처럼 '예술이 생활이고 생활이 곧 예술'인 순간들이 삶에는 가득한 것이다. 생활과 떨어져 존재하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특별할 것이 없고 모든 것이 특별하다. 그것은 같은 무게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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