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재비 주제에

2014. 10. 16. 22:31 from 외면일기

 

눈이 형편없이 나빠졌다. 안과에 갈 때마다 안경을 맞추기 위해 시력을 측정하긴 했지만(2년째 시력 측정만 하고 정작 안경은 쓰지 않자 안과 선생님은 그럴 것 같으면 이런 수고도 하지 말라고 했다) 정말 안경을 맞춘 건 최근의 일이다. 그것도 자의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군대에서특박을 나온 동생이 격할 때 앞이 잘 보이지 않아 헛발포를 한다고 해서 함께 안경점에 갔다가 얼결에 맞추게 된 것이다. 올바른 선택을 위해 이 안경 저 안경을 써보다 결국 동생과 같은 테 다른 색의 안경을 사게 되었다. 비용은 아버지께서 치러 주셨다. 내 얼굴은 안경이 썩 잘 어울리는 편이 아닌데 웬일인지 그 안경은 얼굴에 착 하고 감겼다. 안경의 용도는 뒷자리에 앉아 글씨를 봐야하는 상황(영화관에서 자막 있는 영화를 볼 때나 포럼에서 뒷자리에 앉게 됐을 경우)에 대비한 것인데, 요즘은 책 읽을 때나 글을 쓸 때도 종종 낀다. 지금 컴퓨터를 하는 순간에도 끼고 있다. 결정적으로 안경을 쓴 모습이 지적인 여성을 연상시킴으로 나는 안경 낀 내 모습을 썩 마음에 들어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해야겠다.

 

그렇지만 눈이 형편없이 나빠진 것은 좋지 않은 일이다. 나는 가뜩이나 주변을 살피며 걷는 타입이 아닌데 눈까지 나빠지고 보니 누군가 멀리서 나를 아는체 하며 다가와도 뒤늦게야 "아니 너가 거기 왜 있니?" 하며 호들갑을 떨게 된다. 게다가 눈도 쉽게 피로해져 눈을 크게 뜨는 대신 게슴츠레하게 떠 상대를 응시한다. 눈에 물기를 담고 사물을 쳐다보는 건 내 오랜 습관이기도 하지만. 눈이 이렇게까지 나빠지고 보니 약간 늙은 기분도 들고, 옛날에 언니에게 안경재비(안경잡이를 더 낮잡아 별명화한 이 말은 사전에도 없다)라고 놀렸던 시간도 슬그머니 생각나고 그렇다. 안경 끼는 것을 왜 놀렸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안경재비 주제에"라고 말하면 언니가 몹시 기분 나빠하며 광분했기 때문에 더 신이 나서 놀렸던 것 같다. 언니는 라식과 라섹으로 이제 어엿한 탈안경재비가 되었는데 나는 안경이 이러쿵 눈이 저러쿵하는 안경재비가 되었다. 이래서 사람은 다른 사람을 헐뜯고 흠 잡으며 살면 안 되는 것이다. 내가 서른에 선택적 안경재비가 될지 어떻게 알았겠는가. 인생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라는 어른들의 말씀은 틀린 적이 없다.

 

'외면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도 기승전결  (0) 2015.06.03
새벽 1시의 의인화  (0) 2014.10.17
사주라는 건 말입니다  (0) 2014.09.14
저기 저 편이라니  (0) 2014.09.13
일을 사랑한다는 것과 사랑하는 일을 한다는 것  (0) 2014.09.05
Posted by sputnik.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