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 출장을 왔다. 지방 출장은 자주 다녀봤지만 2박 3일 일정을 소화하는 건 처음이다. 일행이 각자 묵을 방을 빌렸다. 어젯밤 그 방에 누워 욕조에 떨어지는 물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부산은 친구들도 많고 내 어린시절의 추억은 물론, 얼마전까지는 내(부모님의) 집도 있던 곳이었는데 오늘의 나는 '방을 빌려' 혼자 누워 잠을 청하고 있다. 풍경은 낯익은 듯 낯설었다.
오늘은 친구에게 연락해 밀면을 같이 먹자고 했다. 친구와 만나 밀면을 먹으며 요즘 서로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일들을 하고 싶은지 이야기했다. 내가 밀면을 후루룩 거리며 "사실 난 코알라 산책시키는 일이 하고 싶어"라고 말하자 친구가 진지하게 "그게 바로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야"라고 말했다. 역시 코알라 산책은 매력적인 일이었다.
사실 출장을 오기 전까지만 해도 주말 출장이 탐탁지 않았는데, 막상 부산에 오니 휴가를 온 것마냥 기분이 좋다. 맛있는 것도 먹고 바다도 보고 친구도 만났다.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어도 이건 일이 아닌 것 같다. 공기에서는 가끔 옛날 냄새가 났는데 그것이 나를 들뜨게 했다. 좋은 냄새였다. 개인의 '옛날 냄새' 같은 걸 담아 파는 향수가 있으면 좋겠다. 이건 네가 어릴 때 놀러가던 큰 이모집 냄새, 이건 네가 매 여름마다 가던 송정 바닷가 냄새, 이건 저녁밥 지을 무렵의 골목길 냄새, 이건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함께 하던 아침 냄새 이런 식으로 병에 소중하게 담아서 파는 것이다. 그럼 내가 '오늘은 송정 바닷가 냄새를 맡아볼까' 하며 향수를 꺼내 칙칙 뿌려 음음 거리면 어린시절의 마빡이 남동생이 떠오르고 원피스 수영복에 분홍색 캣모자를 쓰고 물에서 막 나오고 있는 언니가 떠오르는 것이다. 많은 것들이 여전히 기억 속에 있지만 그 순간을 결정적으로 함축하는 무언가가 있어 내가 원할 때마다 그대로 복기되었으면 좋겠다. 기억에서 기억이 사라지더라도 기억되어야 할 것들은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작은 사건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래된 대문이 열리고 (0) | 2015.12.30 |
---|---|
풀잎 위의 이슬을 털어내듯 (0) | 2015.12.20 |
안 슬픈 외국어 (0) | 2015.07.26 |
아무것도 하지 않는 감각 (0) | 2015.06.04 |
타이오의 소나기 (0) | 2014.09.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