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위험한 구절

2018. 12. 8. 20:29 from 외면일기




집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외출 자체가 큰 스케줄이 된다. 꼭 나가야만 하는 일이 아니라면 일정을 무한 생략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집을 사랑하는 사람의 일이다. 그것은 하루에 두 번의 외출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단 외출을 했다면 계획했던 모든 일을  시간 안에 마무리하고 돌아오는 편이 좋다. 가령 '다시 집에 들러'라는 전제가 생기면 생각했던 일정이 꼬일 수가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일단 나의 계획은 오전 취재를 끝내고 바로 수영을 하고 원두를 사서 장을 봐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트북과 수영도구를 같이 가져가기에는 무리가 있어 일을 끝내고 다시 집에 들러 가방을 교체하기로 했다. 집에 들른다는 과정이 잠시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수영복과 세면도구를 잘 챙겨뒀고 난 나를 믿었던 만큼 내 의지도 믿었기에 아무런 의심없이 노트북만 챙겨 들고 외출을 했다. 그리고 계획대로 집에 들러 가방을 바꿔 나갔다. 그런데 문득 날씨가 무척 춥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런 날 수영을 하고 나오면 감기에 걸리기 십상이지. 나는 갑자기 동네 마트로 발길을 돌려 자연스럽게 장을 보기 시작했다. 의식의 흐름대로 갖가지 채소를 담고 손질된 닭과 와인도 한 병 골라 넣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낮잠을 잤다. 잠에서 깨자 보람찬 하루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던 하루가 개연성 없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역시 '다시 집에 들러'는 내게 위험한 구절이었다. 그렇지만 뭐 어떤가. 나는 요리 재료를 꺼내 손질했다. 집은 따뜻하고 내가 만든 음식은 맛있었다. 계획은 변경되라고 있는 것이고 일정은 꼬이면 꼬인대로 나름의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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