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같은 창 앞에 섰다

2011. 8. 9. 16:55 from 외면일기

 

 

 

 

똑같은 창 앞에 섰다. 그때처럼은 아니었다. 그 봄날처럼 무너져내릴 것 같지도 않았고 여름의 입구에서처럼 담담하지도 않았다. 그저 입이 살짝 벌어지고 얕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나는 허탈해하고 있었다.

 

그 봄날의 햇살은, 나에게 잔인한 것이었다. 창 밖으로는 따뜻하고 다정하게 대기를 감싸쥐고 있었지만 나는 그 모든 것이 슬펐고, 그 슬픔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아, 나는 이 슬픔에서 두고두고 벗어날 수 없겠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그 감정에서 발을 빼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어느 여름 밤, 나는 그 슬픔에서 벗어나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거기에는 억지성도 괜한 수고로움도 없었다. 계절이 바뀌듯, 자연스럽게 나는 괜찮아져 있었다.

 

지리하던 장맛비가 그치고 햇살이 점점 더 뜨거워지기 시작할 무렵, 같은 창가에 섰다. 슬픔은 완전히 잦아있었다. 실핏 웃음이 스쳐지나가는 듯 했다. 언젠가는 모든 것이 괜찮아진다는 상투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때 나는 집에 가서 따듯한 밥을 지어 엄마가 보내준 고기반찬과 같이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미뤄왔던 화장실 청소를 하고 지저분한 카펫을 세탁기에 넣고 깨끗하게 빨아야지. 곰팡이가 피었을지도 모르는 된장찌개를 버리고 그 그릇을 깨끗하게 씻어서 엎어놔야지. 구석구석 먼지도 닦아내고, 마음 편하게 드라마 한 편 보고 나서 졸릴 때까지 신경숙의 『깊은 슬픔』을 읽을 것이다. 어쩌면 또 라디오를 틀어놓고 잠이 들지도 모르겠다. 아무렴 어때.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하던 일을 언제나처럼 기대 이상으로 잘 해내고 난 다음이었다. 원의 관점을 빌리지 않더라도 끝은 곧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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