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에 다닐 때 학예회에서 부채춤을 선보인 적이 있다. 학예회을 앞두고 나와 친구들은 선생님이 나눠주는 깃털 달린 큰 부채를 양손에 쥐고 부산하게 춤 연습을 했다. 시키는대로 움직이며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오른쪽으로 돌리며 부채를 흔들었다. 흔들림에는 '파도처럼'이나 '꽃잎처럼'과 같은 약속이 있었다. 연습시간은 지루했다. 학예회 당일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열심히 부채를 흔들면서도 이런 걸 왜 하는 걸까 생각했던 것 같다. 동작을 따라가긴 했지만 인위적인 움직임이 부대끼고 어색했다. 춤이 끝나자 객석에 있던 부모님들은 그런 내 마음도 모른 채 예쁘다, 멋있다를 연발하며 박수를 쳐줬다.
부채춤은 이후에도 내게 작은 미스테리로 남았다. 나는 여전히 부채를 흔들던 손짓이나 약속된 동선 같은 것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부채춤 추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한복을 입은 무용수들이 부채를 손에 들고 흥겹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 부채춤이다!'라는 마음에 채널을 멈추고 한참을 바라봤다. 가만히 보고 있으니 사람들의 움직임에 따라 부채가 꽃으로 보이는 것 같았다. 그들의 몸짓에 따라 손끝의 부채는 몽우리에서 만개한 꽃으로 바뀌었다. 왜 어린시절 부채를 들고 있던 우리의 약속이 '꽃잎처럼'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몸을 꽃잎처럼 사용하면 우리 사이에는 한 송이 꽃이 피어난다. 손 끝에 바람을 실으면 꽃은 가만히 흔들린다. 미스테리라고 할 것도 없는 미스테리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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