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없는 카메라

2019. 9. 5. 19:15 from 외면일기

 

 

 

 

어쩌다 보니 선물 받은 카메라가 늘어나 특별한 곳에 가거나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무슨 카메라를 가져갈까 즐거운 고민에 빠지게 된다. 여행을 갈 때는 디지털 카메라와 작은 필름 카메라를 같이 챙겨간다. 지난 방콕 여행 때도 필카를 챙겨갔다. 그 전부터 몇 컷씩 찍어오던 터라 필름을 따로 넣지 않고 이어서 열심히 풍경과 사람을 담았다. 그리고 얼마 전 마침내 셔터를 눌러도 더 이상 필름 수가 감기지 않길래 설레는 마음으로 언니에게 필름을 빼달라고 했다. 언니는 조심조심 필름을 감으면서 어두운 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잠시 뒤 말했다. "필름이 없어!" 옆에 있던 형부님이 말했다. "필름 없이 사진을 찍어온 거예요?"

 

필름통이 활짝 열린 카메라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필름이 없는데도 그 작은 카메라는 내가 셔터를 누를 때마다 오른쪽 상단에 컷 를 성실히도 기록해 나갔던 것이다. 그렇게 찍은 공갈 사진이 무려 36장에 이르렀다. 필름 없는 카메라를 여행지마다 가지고 다니면서 그렇게 소중하게 셔터를 눌러댔다니. "잠깐만, 이건 필카로 찍고 싶어"라고 말하며 주섬주섬 카메라를 꺼내 들던 수많은 시간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예전에 디카로 찍은 사진을 노트북에 옮기다가 모두 잃었을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 찾아왔다. 기록되지 못한 나의 서른 여섯 순간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공갈 사진을 찍어온 그 카메라는 셔터가 유난히 가볍게 눌러진다는 특징이 있다. 사진을 찍을 때마다 '띡' 하는 작은 감각만이 손에 남아 '허무하네'라는 생각이 절로 들곤 했다. 다른 이들도 그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고 나면 "이게 끝이야?"라고 물어볼 정도였다. 어이 없을 정도로 가벼운 셔터감에 우리는 서서히 그 카메라를 '허무 카메라'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띡' 하는 소리만 듣고는 사진이 제대로 찍히고 있는 건지 아닌지 분별할 수 없었다. 사실 그동안은 무심한 셔터음 뒤로 나름 성실하게 결과물을 기록해왔기에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이런 허무함이라니. 아무래도 어느 순간부터 허무 카메라라고 불러서 생긴 일 같다. 사람도 물건도 이름대로 간다고 하더니 정말 그런가 보다. 이름도 별명도 신중하게 지어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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