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전이 가장 맛있는 날은 언제일까. 역시 비 오는 날이다. 비가 오니까 파전을 먹자 하고 부산스럽게 재료를 준비할 때부터 파전은 맛이 있다. 빗소리인지 기름소리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그 '파즈즈즈' 하는 소리가 나기 시작할 때부터 파전은 이미 맛이 있다.
오늘은 그런 날이 될 예정이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릴 것이란 예보를 듣고 어제부터 오늘을 파전데이로 정해뒀다. 그런데 하루종일 내린다던 비가 아침에 서서히 그치더니 햇빛이 비쳐들었다. 전 굽는 소리와 구분이 안 될 만큼 거센 비가 내려줘야 하는데 이렇게 맑은 태양이 떠오르다니. 마음 속에 자리하던 기대가 검을 뽑은 도깨비마냥 파사삭 소리를 내며 불꽃처럼 흩어졌다. 파전을 먹을 때가 되자 빛이 사라지고 다시 먹구름이 하늘을 채웠다. 비는 여전히 오지 않는다. 그래서 파전이 맛이 없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기분의 문제였을 뿐 미각은 여전히 객관적이었다. 파전을 초장에 콕, 간장에 콕콕 찍어 먹으면서 나는 왠지 즐거웠다.
나는 왜 즐거웠을까. 날씨와 파전에 대한 관찰과 기다림과 실망과 즐거움이 일에 대한 걱정을 밀어버렸기 때문이다. 빨강과 파랑으로 이원화 돼 굴러가던 시간에 갑자기 파전이 들어오면서 그라데이션이 생긴 것이다. 별스럽게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더니 파스텔 영역을 만들어 버렸다. 파전을 먹기 가장 좋은 날은 비오는 날이 아니라 머릿속이 복잡한 날이었던 걸까. 파전에서 갑자기 파스텔 톤 내 인생으로 직진하다니 이상하고도 아름답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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