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분이었던 어제 집에서 키우는 호접란에 첫 꽃이 피었다. 샛노란 꽃잎에 자주색 선이 여러 개 가늘게 그려져 있는 꽃이다. 매년 꽃을 피우는 이 호접란은 멀고 먼 길을 돌아 우리집에 왔다. 누군가가 버린 것을 누군가가 주웠고 그 누군가로부터 엄마가 데려왔다. 엄마는 호접란에 꽃이 피지 않고 볼품 없다고 생각해서 내다버린 것 같다고 했다. "이렇게 예쁜 꽃이 필 줄 몰랐겠지." 호접란이 힘을 내서 꽃을 피운 건 엄마의 정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엄마는 호접란이 담긴 화분을 양지바른 곳에 두고 때에 맞춰 물을 주고 영양제를 주면서 매일 보살폈다. 그러자 어느 순간부터 매년 봄의 입구에 들어설 때마다 꽃을 피웠다. 작년에는 꽃 한 송이가 피어나자 봉오리가 점차 늘어나더니 스물 다섯 송이까지 만개했다고 한다. 

 

엄마는 집에서 키우는 또 다른 식물인 페페루의 꽃도 보여줬다. 꽃이라고 했지만 꼭 피기 직전의 이파리 같았다. 엄마도 생김새가 하도 이상해서 알아보니 페페루의 꽃은 원래 줄기처럼 길쭉하다는 것을 알아냈다고 한다. 길쭉한 꽃들은 위로 빠른 속도로 자라고 있었다. 엄마가 키우는 식물들을 보고 있으니 서울에 있는 내 식물들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집을 생각보다 오래 비우게 되어 이미 물주는 주기를 훌쩍 넘긴 아이들이 셋이나 된다. 며칠 전에는 정말 식물들이 걱정 돼 잠도 오질 않았다. 얼마나 목이 마를까. 그런 내게 엄마는 살 운명인 아이들은 버티고 기다릴 것이라고 했다. 문득 운명이라는 말이 참 기대기 쉬운 말처럼 느껴졌다. 나도 얼른 내 식물들에게 물을 흠뻑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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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putnik.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