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이 있는 삶

2021. 3. 26. 17:59 from 외면일기

 

 

 

 

내 삶에는 마감이 찰싹 달라 붙어있다. 꽤 오래 전부터 그랬다. 때로는 매월, 때로는 매일 마감은 빚쟁이처럼 찾아와 내 방문을 두드린다. 언니는 마감이 있는 삶이 사람의 생명을 단축시킨다고 아주 심각하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의를 제기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마감에 쫓기는 내 모습을 떠올리면 그 말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진실로 다가온다. 나는 마감에 쫓기다가 넘어지고 머리를 쥐어 뜯고 욕을 중얼거리곤 한다. 이게 사는 건가 의심하고 이게 삶이라고요 되물으며 의문을 품는다. 무엇보다 마감 때문에 웃었다가 울었다가 갈피를 못 잡는 내가 싫어지곤 하는데 내가 나를 싫어하는 이유가 마감 때문이라는 것이 견딜 수 없이 싫다. 이런 질척이는 감정이 흘러넘치는 것이 마감이다. 생명을 단축시키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닌가.

 

마감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운명의 산 중심부로 가 용암 속에 절대반지를 던지듯 결기를 갖고 행동해야 한다. 정해진 불구덩이 속으로 미련 없이 넣어버려야 끝난다는 얘기다. 주춤거리거나 잠시 다른 생각을 품으면 그 동안의 고군분투가 물거품이 돼 버린다. 이후 비슷한 내용으로 속편이 끊임없이 제작될 테지만 그건 그때 가서 처리하면 될 일이다. 물론, 마감이 무조건 나쁘다고 볼 수만은 없다. 마감이 있는 삶은 나를 진화시키기도 했다. 예컨대 마감은 요령 피우기 좋아하던 내 버릇을 아주 약간 고쳐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아아 고맙습니다 제 고질병을 고쳐주시다니 은인이시군요 하며 마감을 언제까지나 예우하며 함께 지낼 생각은 없다. 나는 언젠가 기회가 오면 마감을 문 밖으로 배웅해 차에 태워 저 멀리 보내버릴 생각이다. 정말로 멀리 보낼 것이다.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를 건네고 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와 문을 닫고 마감 없는 삶을 만끽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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