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을 읽었을 때만 얻을 수 있는 온전한 감각이 있다. 그것을 뭐라고 말해야 할까. 수많은 비유가 있겠지만 느낀대로 표현한다면 숨길이 다시 만들어지는 기분이다. 어떤 문장은 내 좁은 마음의 통로를 따라 조심스럽게 내려가 바닥부터 넓혀준다. 그러면 나는 그곳에 새로운 들숨을 채울 수 있게 된다. 한정원의 《시와 산책》 속 문장들은 친절하고 다정했다. 그가 공들여 골라 쓴 단어가 신중하게 배열돼 있는 책장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나는 나의 숨이 더 깊게 들어가는 것을 느낀다.
책을 읽는 새벽과 밤마다 그와 함께 걷는 기분이 들었다. 급하지 않게 주변 풍경을 둘러보며 걷고 난 뒤 다시 돌아온 방 안에서 나는 한결 순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어떤 책에는 시가 흐른다. '그 무엇도 하찮지 않다고 말하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한 뼘쯤 느슨해진 마음으로 내 시간 속에서 할 일을 할 수 있었다.
겨울을 겨울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 당연한 듯 해도, 돌이켜보면 그런 시선을 갖지 못한 적이 더 많다. 봄의 마음으로 겨울을 보면, 겨울은 춥고 비참하고 공허하며 어서 사라져야 할 계절이다. 그러나 조급해한들, 겨울은 겨울의 시간을 다 채우고서야 한동안 떠날 것이다. 고통이 그런 것처럼.
- 한정원, 《시와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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