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정에 쏟는 정성과 결과가 비례하지 않을 때가 있다. 내 경우 글을 예로 들 수가 있는데, 밤을 지새며 열심히 쓴 글에는 트집과 지적이 난무하다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괴발개발 대충 휘갈겨 쓴 글에는 예상 외로 좋은 피드백이 올 때가 그렇다. 이럴 때는 의문스러움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학창시절에도 시간을 들여 정성스럽게 쓴 글이 아닌 대충 써낸 글로 상을 받은 적이 있다. 가벼운 마음으로 임하면 결과는 더 좋았다. 어릴 때도 그러더니 어른이 되어도 그렇다. 이쯤 되면 대충하는 법을 연습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예전에 안자이 미즈마루의 《마음을 다해 대충 그린 그림》이라는 책을 재미 있게 봤다. 그림체가 단순하고 귀여운 데다 작가가 하는 말도 쉽고 간결해서 보는 재미도 읽는 재미도 컸다. 안자이 미즈마루는 책에서 "저는 뭔가를 깊이 생각해서 쓰고, 그리고 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하지 않아요. 이렇게 말하면 '대충 한다'고 바로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많지만, 대충 한 게 더 나은 사람도 있답니다. 저는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지 않으려나요. 대충 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긴 합니다만"이라고 말했다. 그의 글을 읽고 있으니 나도 대충 한 게 더 나은 사람이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충 한 게 더 낫다고 해서 대충 하는 게 더 쉬운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대충 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은 대충 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일단 대충 해서 좋은 결과가 나올까 하는 의심을 떨쳐 내기 어렵다. 열심히 하는 것이 미덕인 세상에서 대충 한다는 것이 주는 일종의 죄책감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욕심을 덜고 불안을 분리해 마음을 가벼운 상태로 만드는 것은 어렵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날이 갈수록 대충 하는 법을 잊어 가는 것 같다. 대충 넘어가기보다 긴장하고 날카롭게 각을 세우는 날이 많다. 그렇다면 과연 언제 대충 하는가. 여지 없이 마음이 비워질 때다. 의외로 그때마다 'Mr. 좋은결과'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똑똑똑, 저는 좋은결과입니다" 하고 노크를 한다. 가끔은 그가 찾아오길 기대하며 일부러 어깨와 미간에 들어간 힘을 빼고 대충 하는 척 연기를 할 때도 있는데 나도 모르게 다시 진지해져서는 열심히 하고 있다. 물론 대충 하는 척 하다가 정말로 마음이 가벼워져 쾌활하게 마침표를 찍을 때도 있다. 얼마나 경쾌한지. 그 즐거움을 떠올리면 역시 대충 하는 것을 열심히 연습해야겠다는 생각이 굳어진다. 대충 하고 싶을 때 대충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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