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성

2022. 8. 19. 21:20 from 밑줄을 긋다

 

 

 

 

정혜윤의 《아무튼, 메모》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우리는 피하고 싶은 단어들을 곧 마주친다. 암, 골다공증, 우울증, 노화, 실패, 외로움, 상실, 배신, 죽고 싶은 마음. 그러나 미래에 이것만 오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다른 것도 오게 해야 한다. 어두움 외에 뭔가가 와야 한다면 그 오는 것은 빛처럼 아주 좋은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빛은 무엇일까? 오래전 나의 메모에 따르면 빛은 나 아닌 외부 세계의 좋은 것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이다.)

- 정혜윤, 《아무튼, 메모》

 

정혜윤 PD도 가장 좋아해서 별 표시를 열 개쯤은 해뒀다는 메모. ‘빛은 나 아닌 외부 세계의 좋은 것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이다.’ 출근길에 읽었던 이 말은 퇴근 후 침대에 누워 잠들기 전 또 다른 책에서 또 다른 문장으로 만나게 된다.

 

세상이 크다는 사실이 구원이 된다. 절망은 사람을 좁은 공간에 몰아넣고, 우울함은 말 그대로 푹 꺼진 웅덩이다. 자아를 깊이 파고들어 가는 일, 그렇게 땅 밑으로 들어가는 일도 가끔은 필요하지만, 자신에게서 빠져나오는 일, 자신만의 이야기나 문제를 가슴에 꼭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는 탁 트인 곳으로, 더 큰 세상 속으로 나가는 반대 방향의 움직임도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양쪽 방향 모두로 떠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며, 가끔은 밖으로 혹은 경계 너머로 나가는 일을 통해 붙잡고 있던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일이 시작되기도 한다. 

- 리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

 

읽고 있는 책들에서 이런 동시성을 발견하면 기분이 묘해진다. 마치 온 세상이 나에게 이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애쓰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것이 내가 계속 생각하고 있었던 주제라면 더욱 그렇다.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리기만 해도 전혀 다른 풍경을 만날 수 있다는 것. 낯선 단어를 마주치고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 경계 너머에는 언제나 새로운 세계가 흐르고 있다는 것. 

 

'밑줄을 긋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주 오랜만에 편안하다는 느낌  (0) 2023.01.28
소설을 쓰지 않더라도  (0) 2022.09.11
벚꽃이 묻은 날  (0) 2022.04.05
요가와 도자기  (0) 2022.02.26
느리고 느슨하게  (0) 2022.02.09
Posted by sputnik.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