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밤 파리. 마호가니 책상 위에 놓여진 술이 가득 달린 조명등에서 흘러나온 빛이 방 안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다. 아버지에게 쓴 편지를 턱을 괴고 읽어내리다 말고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창을 활짝 여는 사브리나. 누군가 연주하는 '장미빛 인생'이 열린 창으로 천천히 흘러들어온다. "여기서 보낸 2년은 정말 잊을 수 없을 정도로 멋진 나날들이었어요. 지금은 밤이 깊었어요. 누군가 '장미빛 인생'을 연주하고 있네요. 그 뜻은요. 장미빛 유리잔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거예요. 마치 제 마음 같아요. 전 여기서 너무 많은 걸 배웠답니다. 비네그레트 소스를 얹은 송아지 요리 말고도 더 많은 것을 배웠어요. 제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 나가야 할지, 그리고 제 인생을 방관적으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았어요. 이제는 인생이나 사랑 때문에 도망치려고 하진 않을 거예요."
파리에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 사브리나는 라러리 가문의 큰 아들 라이너스와 요트에서 대화를 나눈다. "감정적인 이유로 모든 걸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라는 라이너스의 질문에 사브리나는 "물론!"이라고 말하며 그에게 파리로 가보라고 권한다. "제겐 많은 도움이 됐어요. 파리에 가본 적 있어요?" 라이너스는 이라크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딱 한 번 35분 동안 파리에 있었던 적이 있다고 답한다. "파리는 비행기를 갈아타는 데가 아니에요. 사람의 시야를 바꾸고 창문을 활짝 열어 장미빛 인생을 받아들이게 하는 곳이에요." 사브리나는 파리에 가면 가장 먼저 이슬비가 아닌 진짜 비를 흠뻑 맞으라고 조언한다. "그 다음 상냥한 여자와 함께 택시로 볼로뉴 숲에 가세요. 비는 아주 중요해요. 비가 내리면 파리는 최고의 향취를 내거든요. 밤나무가 흠뻑 젖어요."
'장미빛 인생'은 틈틈이 사브리나의 인생에 흐른다. '관절염에 걸린 풋내기 학생 꼴'로 자기도 모르게 조금씩 사랑에 빠지기 시작한 라이너스에게 그녀는 이 노래를 불러준다. 영화에는 춤추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사브리나는 춤을 출 때마다 언제나 자신의 오른쪽 뺨을 상대의 오른쪽 뺨에 한껏 갖다 댄다. 창문을 활짝 열어 장미빛 인생을 받아들인 그녀에게 어울리는 모습이다. 기억해야할 것은 어디선가 장미빛 인생이 들려오면 귀를 기울이고 창문을 활짝 열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건 창문을 활짝 열어두는 것이다.
이 영화에 개인적인 아쉬움이 한 가지 있다면, 첫 장면에서 사브리나가 언급한 정원에서 키우는 금붕어를 돌보는 조지라는 남자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쩐지 착한 남자일 것 같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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