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천득의 『인연』에 '그리워하면서도 한 번 만나고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 서로 아니 만나 살기도 한다'라는 유명한 구절이 나온다. 보고 싶어도 아니 보고 사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가고 싶어도 아니 가게 되는 장소가 있다. 경복궁에 그런 장소가 하나 있다.
경복궁 돌담길이 마주 보이는 그 카페에 가게 된 것은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심했을 무렵이다. 그곳은 음악을 좋아하는 주인이 운영하는 소담한 카페로 곡 선정도 좋고 창 밖으로 돌담길과 하늘, 나뭇가지에 매달린 나뭇잎들의 산들거림이 기분 좋게 보이는 곳이었다. 여기 참 좋다, 함께 간 언니와 창 앞에 자리를 잡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주인 아저씨가 다가와 음악 이야기며 책 이야기를 시작했다. 곧 긴 여행을 할 참이라고 하니 "그러면" 하며 책 추천도 해줬다. 꽤 많은 책들을 소개받았다. 유명한 책도 있고 처음 들어보는 책도 있었다. 노트에 그 제목들을 받아 적었다. 그런저런 이야기가 밤 늦게까지 이어졌고 급기야 흥이 오른 주인이 아끼는 와인을 우리에게 따라주며 자신의 비극적인 러브스토리를 들려주기에 이르렀다. 그때부터 시간의 조율이 조금씩 엉키는 것 같더니 멀미가 나기 시작했다. 가끔 지나치게 긴 이야기나 설명을 듣다 보면 온 몸이 뒤틀리는 한계점이 오곤 한다. 우리는 시계를 보며 너무 늦었다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주인은 길 밖까지 배웅을 해줬다. 굉장히 친절했고 또 불편했다.
그 후로 언니와 나는 서로 이렇다 말을 하진 않았지만 그 카페에는 가지 않았다. 그날의 즐거웠던 기억과는 별개로 더 이상 발길이 닿지 않았다. 돌담길을 지나더라도 고개를 들어 카페가 여전히 잘 있는지만 확인하고 가던 길을 계속 간다. 좋은 곳이지만 더이상 가지는 않게 된 것이다. 그 장소가 싫은 건 아니다. 오히려 좋아한다. 여전히 한 번씩 생각나고 마음만 먹으면 아주 선명하게 떠오른다. 주말이었지만 붐비지 않았던 카페 내부 풍경과 창 밖으로 내다보이던 하늘, 구름, 바람, 나뭇잎들의 부대낌. 그리고 카페에 흐르던 연주 소리와 약간의 소음. 추천받은 책들을 노트에 쓰고 있는 우리 모습. 그날 이후 나는 일을 그만두고 꽤 오랫동안 언니가 사는 홍콩에 머물렀다. 무더운 여름이 시작되고 있었고 언니와 나는 아저씨가 추천해준 책들을 방 한 켠에 쌓아놓고 그 시간 동안 읽어나갔다. 언니와 그 책들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면 늘 "정말 고마운 아저씨였지?"라고 말하곤 한다. 파마머리의 그 아저씨는 마치 책을 추천해주러 온 요정처럼 "여행을 간다고 들었어. 내가 책을 추천해주러 왔지. 와인도 마실테야?" 하며 내가 모르던 세계로 나를 한 발자국 이끌어준 것 같다. 그리고 요정이 살던 그 창문이 있던 카페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은 그날 다 써버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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