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 없는 설날

2017. 1. 28. 11:56 from 외면일기

 

 

 

이번 설 연휴에는 고향에 가지 않았다. 명절마다 기차표를 구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늘 손은 눈보다 느렸고 나는 연휴 때마다 버스에 몸을 싣고 뉴스에 나오는 고속도로 정체구간 한가운데서 차창 밖을 바라보거나 자리에서 목이 꺾여 잠들어 있었다. 그렇게 몇 번의 명절을 반복하다 어느 날 그럴 필요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느린 손이 기차표 예매 클릭에 여느 날처럼 실패하던 날이었다. 집에 전화해 명절 전후 표가 있는 날 여유 있게 내려가 가족끼리 시간을 보내면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가족들은 좋은 생각이라고 동의했다. 그래서 어제 처음으로 민족 대이동의 대열에서 빠져나왔다. 도로 위에서 시간을 보내는 대신 집에서 교토여행 책자를 보며 일본여행 준비를 하고 영화 예매를 했다. 내일은 국립현대미술관에 갈 것이다.

 

연휴를 가족들과 떨어져 외따로 보내는 건 처음이다. 그동안 내게 명절이란 새벽 일찍 일어나 씻고 옷을 차려 입고 친척집에 가서 인사를 하고 차례를 지내고 밥을 먹고 과일을 먹고, 작은집으로 이동해 또 인사를 하고 차례를 지내고 밥을 먹고 과일을 먹으며 지내는 날이었다. 이른 새벽부터 시작되는 인사와 절과 밥과 과일의 시간. 가족끼리 모여 안부를 묻고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피로감에 절게 되는 명절 자동화 시스템에서 빠져 나와 보니 이렇게 평안할 수가 없다.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서울은 그야말로 고요의 도시가 된다. 길거리에는 차도 사람도 없다. 가족들의 동의도 얻었으니 아마 앞으로도 명절은 고요의 도시 속에서 보낼 것 같다. 그러다 사람들이 밀물처럼 밀려들어오면 나는 썰물이 되어 나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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