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여름휴가를 다녀왔다. 열흘 간의 휴식이 끝나고 출근을 앞두고 있다. 나는 내일이 오는 것을 미루기라도 하듯 잠들지 못하고 있다. 이번 여행지는 태국. 식도락과 휴식이 주제였다. 똠양꿍과 솜땀을 시작으로 갖가지 향신료로 가득 찬 음식들을 매일 맛보았다. 냄새가 지독하다는 소문의 두리안도 처음 먹어봤다. 시큼한 냄새가 났지만 잘 익은 고구마 같은 식감과 달콤함이 곧 냄새를 앞질렀다. 나중에는 '두리안의 어디에서 무슨 냄새가 난다는 거야?'라고 반문할 만큼 그 말랑한 과육에 중독되었다.

 

머무는 동안에는 되도록 다양한 곳에서 음식을 맛보려 했는데 그럼에도 세 번을 찾게 된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있었다. 현지인보다 유럽인이 더 많은 오리지널 레스토랑이었다. 그곳에 갔던 첫 날,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한 외국인 남성이 기억에 남는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어제 먹었던 것 그대로"라는 드라마 속 대사를 하더니 식탁에 순서대로 내어지는 음식을 아주 천천히 음미했다. 대놓고 관찰한 것은 아니고 관자놀이에 있는 제3의 눈으로 바라본 것이다. 그는 시종일관 온화한 표정이었는데 오래 전부터 얼굴에 밀착돼 온 듯한 표정이었다. 여행지의 하이라이트는 가끔 의외의 것에 숨어 있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식당에서 본 이방인의 표정 위에 그것이 있었다.

 

아무 할 일 없는 장소에 있자니 매일 아침 일어나는 시간도 조금씩 늦어졌다. 늦잠은 달콤하고 고소했다. 오랫동안 알아왔지만 잊고 있었던 맛이다. 쉬어 보니 내게는 휴식이 필요했다. 언니가 가끔 "넌 자주 일에만 집중돼 있어서 옆에서 한 번씩 흔들어 줘야 해"라고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휴가를 떠나올 때 나는 일에 대한 생각을 A4 용지 접 듯 한 번 접고 두 번 접어 서랍 속에 단단히 넣어뒀다. 일은 이제 서랍 속에 있다. 내 머릿속에는 없다. 내 머릿속에는 이제 두리안만 있다. 노랗고 말랑말랑 부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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