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부암동에 위치한 박노수 미술관에 다녀왔다. 1938년에 지어진 오래된 가옥이다. 박노수 화백은 이곳에서 1973년부터 2011년까지 살다 종로구에 본인의 작품과 집을 함께 기증했다. 이후 그의 집은 종로구립 박노수 미술관으로 운영되며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 80년 된 2층 벽돌집에 신발을 벗고 들어서자 과거 거실과 침실로 사용되었을 공간들에 그의 그림이 걸려 있다. 섬세한 선이 눈에 들어오고 뒤이어 파란 나무와 색이 없는 강이 마음에 앉았다. 이번 전시의 타이틀은 '강상청풍-맑은바람'이었는데 그림을 바라보고 있으면 정말 바람 한 줄기가 귀 옆을 스쳐지나가는 듯 시원함이 느껴지곤 했다.
미술관은 박노수 화백이 타계한 2013년 이후부터 개방됐다. 고택은 안방, 거실, 응접실, 화장실, 작업실, 서재, 다락방으로 구성돼 있다. 다락방은 2층에 있다. 지붕이 만들어낸 기울어진 천장과 네모난 창이 있는 아늑한 공간이다. 그동안 진행한 전시와 미술관에서 열린 공연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목재 건물의 오래된 바닥은 밟을 때마다 삐걱삐걱 소리를 냈다. 아무리 조심스레 걸어봐도 어쩌지 못하는 소리가 난다. 복도 곳곳에는 '80년된 고택입니다. 조심해서 걸어주세요'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한 번에 수용하는 인원도 15명으로 한정돼 있다. 내부 촬영은 금지돼 있고 창문에는 '창을 열지 마세요'라는 안내 문구가 붙어 있다. 마른 나무가 어른거리는 창에는 찬 겨울공기가 서려 있다. 여러모로 엄격하고 주의사항이 많은 미술관이다.
그가 그린 동양화는 선과 여백 그리고 신중하게 선택된 몇 가지 색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림에는 말이 있고 새가 있고 꽃이 있다. 나무와 산과 강도 있다. 무엇보다 조용히 풍경을 바라보거나 천천히 길을 가는 사람이 있다. 어떤 이는 차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다. 2층에선 박노수 화백이 쓴 편지글을 볼 수 있었다. 원고지에 써내려간 소년 시절의 바람과 상상력이 거기 있었다. 박노수 화백은 한 신문에서 그가 그림을 그릴 때 선과 여백과 먹을 선택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통의 체득은 겉모습의 답습이 아니고 오직 그 마음의 저류를 깊이 탐구하는 데 참뜻이 있다. 왜 동양화에서 선을 택하였고, 왜 여백에 역점을 두었으며 왜 그 많은 빛깔 중에서 먹을 기본으로 삼았을까 하는 점을 우선 생각해야 하겠다." - 독서신문, 1973. 2. 18 <가장 동양적인 것, 문인화의 길>, 박노수의 글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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