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말이 있다. 소설을 어떻게 쓰는냐는 질문에 움베르토 에코가 한 대답이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씁니다." 나는 이 말을 무엇이든 순서대로 하면 된다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가끔은 이 말의 응용 버전인 "한 줄 다음에 또 한 줄"이란 말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고 해야 할 일들을 해치우곤 한다.
'한 줄 다음에 또 한 줄'을 되뇌며 도달하고 싶은 곳은 다름 아닌 결말 그 이후다. 결말 다음, 또 다른 시작 이전. 그 사이에 존재하는 아무것도 할 일 없는 상태를 원한다. 온전하게 아무것도 할 일 없는 상태를 만나기란 상당히 어렵다.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순차적으로 일을 했다면 어느 지점에는 반드시 그런 순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오늘이 그런 날이다. 아무것도 할 일 없는 상태에서 아무 일이나 하는 것은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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