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가 얼마 전 내가 홍콩집에 놀러갈 때마다 교복처럼 찾아 입던 언니의 여름 잠옷을 줬다. 부드러운 면 재질의 반바지 점프수트로 잔꽃무늬가 가득한 옷이다. 그 잠옷을 입으면 홍콩의 여름이 떠오른다. 초록소파에 길게 누워 언니가 만드는 요리 냄새를 맡으며 천천히 넘기던 책장. 공기 중에 언제나 흐르고 있던 음악. 아침에 커튼을 열면 보이던 산과 구름. 밤의 수영장에서 오징어 수영을 하고 돌아와 마시던 맥주. 소호 거리를 걸으며 베어 물던 에그 타르트.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에 기대어 내려다보던 골목. 서로의 시간이 맞물려 잔잔하고 평화롭게 흘러가던 날들이 차곡차곡 떠오른다. 어떤 물건은 기억을 건드리고 나를 다시 그 자리로 데려간다. 

 

그런 물건은 또 있다. 가까운 벽에 기대 서 있는 르네다. 르네는 나의 기타다. 20대 중반 기타를 배우고 싶어서 낙원상가에 가서 직접 데려온 아이다. 회사가 끝나면 설레는 마음으로 홍대에 기타를 배우러 다니던 때가 있었다. 많은 코드와 주법을 배웠는데 대부분 잊어버렸다. 지금은 튜닝도 틀어져서 아는 코드를 짚어봐도 아는 음이 나오지 않는다. 르네는 그 시절 읽던 책의 인물에서 따온 이름이다. 나는 요즘도 르네를 끌어안고 띵 띠리링 하는 소리를 내곤 하지만 그것을 연주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저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라는 확인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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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putnik.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