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괴리감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서로 어그러져 동떨어진 느낌. 괴리감은 요즘 무시로 나를 찾아온다. 내가 바라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과 진짜 내 모습 사이의 괴리감, 그리고 이상과 현실 속 남자들 사이의 괴리감. 그러나 나는 그 어떤 괴리감도 탓할 수가 없다.
어제는 친구의 결혼식이었다. 일단 가려는 시간에 표가 없어 남는 시간 동안 도넛이나 뜯으며 왜 예약을 하지 않았을까 후회하는 일부터 해야 했다. 다음 차편은 가는 내내 수서느림보 같더니 결국 자도 자도 제자리인 것만 같은 환각을 안겨주었다. 잠도 다 달아나고 끝도 없이 보이는 산과 나무를 보고 있자니 산이 나를 꿀렁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물이 침잠하듯 존재를 삼키는 존재라면 산은 눈 돌릴 여유도 없이 존재를 꿀꺽하고 삼키는 존재가 틀림없다. 푸르게 푸르게 언제까지나 그곳에 서서 이리오라며 손짓하고 있지 않은가. 곳곳에 어둠을 숨기고서 말이다.
그렇게 겨우 부산에 도착해 잡아 탄 택시는 낡은 개인 택시였다. 택시 만큼이나 늙은 택시 기사는 내가 하는 길 설명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심지어 어디서였는지 모르게 신용카드를 잃어버린 상태였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식장에 도착하니 식은 끝나 있었다. 아 정말 싫다, 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날 저녁 부산역으로 갔다. 매표소에서 부산 가는 제일 빠른 거 하나요, 라고 하니 아저씨가 웃지도 않고 여기가 부산이오, 친절히 알려줬다. 기차를 타고 가는데 매점 아주머니가 카트를 밀며 지나갔다. 고개를 돌렸더니 나란히 압축 포장된 길쭉한 소시지 5개가 눈에 들어왔다. 그 소시지로부터 어린 시절 나의 주말이 떠올랐다. '모든 것은 소시지로부터 시작되었다' 아니면 '나는 소시지로소이다' 같은 제목이 어울릴 법한 발단이다. 다른 게 아니라 어린 시절 외할머니 댁에 놀러갈 때마다 아빠는 언니와 내게 간식 고를 권한을 줬고, 우리는 대부분 소시지를 골라서 서로 까먹었다. 대개는 언니 3개, 나 2개가 룰이었다. 위계질서에 따라 언니에게 양보한 건 아니었고 어릴 때 내 입이 짧은 이유였다. 여행을 하는 동안에는 미리 목적지에 가서 서성이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외할머니 댁에 가서 즐거운 건 외할머니 댁에 가서 즐거우면 되니까.
괴리감이 무시로 나를 찾아온다. 그러나 아무것도 탓할 수는 없다. 결국 모든 것은 내가 선택하는 거니까. 그렇다면 이 괴리감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원하는 것을 바꾸거나 나를 바꾸거나. 수드라가 수드라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인도에서 탈출하거나 인도를 바꾸는 방법 밖에 없는 것처럼.
'외면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금이가 죽었다 (0) | 2012.05.28 |
---|---|
말과 침묵 (0) | 2012.05.21 |
졸음에 겨운 날들은 지나갔다 (0) | 2012.05.05 |
얼어죽을 비교 프레임 (0) | 2012.05.04 |
나는 요즘 드라마를 보지 않는다 (0) | 2012.03.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