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근처 작은 공원을 다섯 바퀴만 돌고 오자고 마음 먹고 나간 길이었다. 산책로를 걸으면서 나는 벤치에 앉아 있는 한 여자를 봤다. 긴 카디건을 걸치고 눈물을 훔치는 여자 옆에는 맥주 두 캔과 안주였는지 식사였는지 모를 먹다 남은 빵이 있었다. 그 주변으로 벗어놓은 마스크와 가방이 놓여 있다. 여자는 내가 공원을 다섯 바퀴 다 돌 때까지 그곳에 앉아 있었다. 나는 오지랖이라고는 없는 사람인데 어쩐지 용기를 내 그 여자에게 다가가는 상상을 한다. 맥주 같이 마실까요. 나는 사직서를 냈거든요. 그게 벌써 20일 전인데요. 옮길 곳도 정해졌는데 마음이 이상하게 왔다갔다 해요. 그러나 내가 여섯 바퀴째 공원을 돌고 오자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왜 그 여자에게 말을 걸 생각을 했을까. 말을 걸고 맥주를 나눠 마시면 마음의 괴로움이나 아픔이 잠시 사라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 걸까.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어떤 슬픔 앞을 반복해서 지나갔을 뿐이다. 빈 벤치를 지나 집으로 돌아왔을 뿐이다.
땀에 젖은 옷들을 세탁기에 넣고 샤워를 하고 나왔다. 냉장고에서 차가운 레몬을 하나 꺼내 레몬수를 만든다. 세탁기에서 빨래가 끝났음을 알리는 멜로디가 들린다. 옷가지를 꺼내 남아 있는 물기를 탈탈 털어 건조대에 넌다. 까맣게 젖은 감정도 이렇게 빨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샤워를 하는 동안 세탁기에 돌리면 좋잖아. 아니면 직접 비누를 묻혀 따뜻한 물로 씻어서 보송보송 말리는 것도 괜찮아. 노란 레몬수를 마시면서 아주 잠깐 그런 상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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