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기억은 어디까지 믿을만한 걸까. 여섯 살 때 서면 지하도에서 엄마를 잃어버린 적이 있다. 경찰 아저씨의 도움으로 미아 위기에서 벗어날 순 있었지만 그 사건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완전히 달랐다.
1. 나의 기억.
등장인물: 엄마, 언니, 나.
배경: 서면 지하상가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발단) 엄마가 언니와 함께 물건을 바꿔 올테니 코너에서 짐을 보며 잠깐만 기다리라고 한다. (전개) 엄마가 사라짐과 동시에 나는 엄마를 따라 가지만 이내 길을 잃고 헤매다 경찰 아저씨 두 명에게 발견된다. (위기) 다행히 집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었던 나는 아저씨들의 도움으로 집으로 전화를 걸지만 당연히 집엔 아무도 없다. (절정) 그러던 찰나 엄마가 나를 발견하고 뛰어온다. 어떻게 된 거냐며 나를 안고 경찰 아저씨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결말) 나는 울지 않고 씩씩하게 엄마에게 안겨 집으로 돌아와 그날 저녁 엄마가 아빠에게 그 일을 말하는 걸 들으며 담담하게 과일을 먹는다.
2. 엄마의 기억
등장인물: 엄마, 나(언니는 피아노 학원에 가야 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다고).
배경: 서면 지하상가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발단) 계단을 내려오는데 내가 아까 산 초콜렛이 먹고 싶다며 엄마에게 달라고 한다. (전개) 엄마가 가방을 뒤적이며 초콜렛을 찾는 사이 갑자기 내가 사라진다. (위기) 한참 나를 찾아 헤매다 미아보호소에 갔지만 나는 없고 담당자가 오늘 내로 아동이 오지 않으면 찾기 힘들 것이라고 겁을 준다. (절정) 경찰 아저씨가 데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달려간다. 어디 갔던 거냐며 혼내려고 했으나 내가 "엄마가 없어서 슬프게 슬프게 울었어."라고 말하는 바람에 혼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결말) 집에 돌아오는 내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훌쩍거리는 나로 인해 마음이 아팠다고 한다. 그날 저녁 아빠에게 낮의 일을 이야기할 때도 나는 기운이 잔뜩 빠져 있었다고.
기묘하다. 기억이란 정말 사람들이 각자의 편의대로 바꿔 간직하는 것일까. 오늘 영화 <라쇼몽>을 봤다. 라쇼몽은 도깨비들도 인간의 추악함과 흉폭함이 무서워 도망가는 곳이다. 스님과 나무꾼이 라쇼몽 아래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면서 "모르겠어, 전혀 모르겠어."라는 말을 하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그들은 하나의 살인사건에 대해 세 명의 가해자이자 피해자이자 목격자들의 진술이 모두 달랐던 것을 회상한다. 회상 후 스님과 나무꾼, 그리고 지나가던 행인까지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주제는 한결같다. "대부분의 경우 우린 자신에게도 정직하지 못해." "약한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나쁜 것은 잊고 싶어하고 꾸며낸 좋은 것만 믿으려 하지. 그게 더 쉽거든." "저도 제 본심을 모르겠습니다." "이기적이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걸." <라쇼몽>을 만든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영화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인간은 스스로 그들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정직할 수가 없다. 스스로를 미화하지 않고선 배기지 못한다. 이 이야기는 바로 그런 인간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스스로가 실제보다 더 나은 인간이라고 느끼도록 거짓말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인간들. 심지어 죽은 자조차 거짓을 말하는 장면에서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기심이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갖게 되는 죄이며, 구원받기 가장 어렵다. <라쇼몽>은 자아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묘한 자품이다. 이 작품에 대해 전혀 이해할 수 없다면, 그 이유는 인간의 마음 그 자체가 이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 심리에 대해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다시 본다면 핵심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라쇼몽>은 하나의 사건을 여러 시각으로 재현한다. '라쇼몽 효과' 또는 '라쇼몽 기법'이라 불리는 이 전개 방식은 관객에게 진실의 실체를 가리거나 변형해 전달하는 효과를 가진다. 현실에서는 이를 '라쇼몽 현상'이라 표현하는데, 이는 기억의 주관성에 관한 이론이다. 이기심은 진실을 왜곡한다. 그래서 <라쇼몽>에는 진실이 없다. 그저 '왜 그들이 사건에 대해 각자 다르게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묻고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만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말대로 역시 인간 심리에 대한 완전한 이해는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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